채란 문학실

[수필] 헤어스타일에 대한 고찰(考察)

미송 2014. 7. 12. 10:00

 

 

 

 

어스타일에 대한 고찰 / 오정자

 

아침마다 머리를 감던 습관이 바뀌었다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 머리를 감다 보니 다음 날 아침 다시 샴푸하고 린스한다는 게 낭비인 것 같고,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 두건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실 집안에만 있으면 머리를 안 감아도 상관이 없지만출근을 하려면 그렇지가 않다밤새 구겨진 스타일을 정리해야 하니까. 어쨌든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두건을 쓰고 외출하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두건 쓴 내 모습에 시선이 끌리는 듯 했다. 두건이 잘 어울려요, 어머나 딴 사람 같아요, 하고 말했다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동그란 얼굴이 그런 것도 같았다. 게을러서 뒤집어쓰기 시작한 두건인데 사람들은 특별해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닐까 하여 관심을 보이는 듯 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편하니까 그냥 통과였다

 

화요일 아침에는 버스  좌석에 앉았던 사람까지 '두건이 잘 어울리는데요' 하며 말을 걸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모르는 이에게 선뜻 말을 걸까내심 놀라며 '내가 많이 오염되었구나' 생각했다가발핀으로 뒷머리를 우아하게 마무리한 그녀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제가 좀 게으르고 싶어서 두건을 썼어요' 라고 말하자 그녀는 무릎 위 낡은 노트에 기록이라도 할 냥, 이것저것 또 물으며 말을 더 걸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데 아침에 버스를 탔냐일하는 가게는 어떤 곳이냐노는 시간대는 어떻게 되느냐. 덧붙여, 두건을 제대로 못 쓰면 오히려 어두워 보이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독특하니 예쁘게 보인다고화제(話題)를 되돌렸다사실은 성가셨지만 직업의식이 투철한 나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그리고 그녀는 무슨 공부를 하러 가는지 평생정보교육관으로 향했다.

 

우리 가게 쇼파에서 낮잠을 자고 갔던 S씨를 앞세우고 버스에서 만난 그녀가 사흘 후에 나타났다그 사이 그녀의 얼굴을 잊어 버렸던지 20분 만에야 겨우 기억이 떠올랐다시골이란 , 말 그대로 한 치 건너 두 치만 짚고 나가면 서로 다 아는 사람이라더니순간 나는죄짓고 살면 안 되겠다는 불안감에 흔들렸다.

익명으로 살아도 무관한 대도시에선 머리에 울긋불긋한 두건을 쓰든 까만색 복면을 하고 다니든 허벅지를 드러내고 다니든 롱치마로 거리를 청소하고 다니든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슷비슷하니까. 그러나 시골에선 좀 다른 처신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정적이 깨지는 순간도 잠시이니까

 

마흔 후반에 서울 아닌 시골을 택한 이유도 사실 '조용히 살자'는 신조를 따르기 위함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점점 시끄럽게 살고 있다.

 

다음 날, 두 명의 그녀들은 또 한 명의 그녀를 모시고 우리 가게로 들어왔다그녀는 문협에서 일하는데 평교원으로 2주에 한 번 외출하여 시창작 수업을 한다고 하였다. 대화 도중에 내 입에서도 시 얘기가 나갔었나 본데, 그건 어디까지나 맞장구를 치려다 보니 했던 얘기다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번엔 시로 부터 출발해 시로 되돌아오는 대화가그녀들이 모셔온 선생님과 이어졌다. 팔 다리 입술을 문어발처럼 사용하며 한 시간 이상을 떠들다 보니, 지난 번 그 쇼파에서 낮잠을 잤던 S씨가 손을 가리고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 닦고 있었다미셀 푸코니 슬라보예 지젝이니 해미읍성이니 문태준이니 고진하씨와의 인도철학이니 하는 태그로 시작된 것이 다시 브라만이니 붓다 열반이니 적멸 무간지옥이니 무아, 공사상이니 하는 태그로 옮겨가다 결국 내 전공까지 들어가 기독교 비판에서 절정을 울렸던 거다엄청 떠들었구나 반성을 하며 그녀들을 아쉬운 듯 배웅하였는데, 그녀들은 뙤약볕 아래 나가 서서 점심 먹으러 같이 가자고 다시 종용하였다

 

문을 닫고 들어와 에어컨 밑에서 머리를 식히는데 나는 금방 후회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었나…….

 

역시 머리에 썼던 두건은 패션의 하나가 아니라아줌마 티를 안 내려는 가리개였구나헝클어진 머리를 그나마 잘 보이려 했던 애틋한 노력이랄까적당히 아는 체 하고 적당히 보여줘야 한다는 게 또한 나의 신조였는데, 나는 그걸 망각하고 순간 기분으로 그녀들 앞에서 홀라당 벗어버리고 말았다

 

한때는 과다노출증으로 잔소리도 들었지만마흔 후반에 접어들면서 나는 제법 나를 정숙해졌다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도 가만 보니 두건이란 가리개 덕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떠드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의 얘기를 대부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나여서 얌전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 같다. 그런 내가 보물창고를 연듯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놓으면, 사람들은 멈칫하는 분위기. 그때서야 요 입이 방정이다 하면서 본색을 감춘다. 

 

아무튼, 두건으로 시작해 개똥철학으로 엉클러진 속내를 다 들켜버렸으니 다음엔 그녀들을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소심한 척아예 차도르를 걸치고 나설까, 생각하며 지금 나는 이슬람여성들이 착용하는 차도르까지 찾고 있다. 히잡과 차도르의 다른 모양을 꼼꼼 살피며, 히잡으론 안 되겠다 아예 발끝까지 덮어 쓰는 까만색 차도르면 적당하겠네! 이렇게 반성하며 피식 웃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떠드는 분야에 의외로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한번쯤은 깊이 생각하자.)  

 

 

 

 

 

'채란 문학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키다리 아저씨와 종합선물  (0) 2014.08.20
[시] 붓질이거나 춤  (0) 2014.07.21
[시] 바람비 내리는 날에는   (0) 2014.07.04
[시] 사랑하는 그대에게  (0) 2014.06.19
[수필] 애증 사이에서  (0) 201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