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 <허브 도둑>
허브 도둑 / 장옥관
『난초 도둑』이란 소설도 있지만 정말 허브를 도둑맞는 일이 있
었습니다. 새들새들한 게 안쓰러워 거름 주고 햇볕도 주려 복도 끝
창가에 내놓았지요. 그런데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화분이 감쪽 같
이 사라진 겁니다. 기막히고 허탈했지만 이내 맘을 바꿔 먹고 짧은
쪽지를 써 붙였지요.
이 자리에 놓여 있던 화분을 가져가신 분께
아마 저보다 더 그 꽃을 사랑하실 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마침 거름을 넣어주었으니 6개월 안에는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그 꽃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런데,
오늘 화분이 돌아왔습니다. 볼일 마치고 오니 그 자리에 화분이
머쓱하게 앉아 있습디다.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 낯선 얼굴
이었습니다. 써 붙인 쪽지 떼어내고 이런 쪽지를 붙여 놓았더군요.
이 화분에 대해서 걱정하고 계신 분께
이 화분이 잠시 새로운 지평선이 보고 싶어서 짧은
여행을 다녀왔어요. 이제 돌아왔으니 행복하다고 하네요.
배수로에 엎드려 하의 벗긴 채 발견되지 않고 말짱하게 돌아온
허브의 알리바이가 기적 같았습니다. 올 봄 허브꽃은 아무래도 깨
끗한 속옷 빨래처럼 희디희게 피어나겠습니다. 축축한 골짜기마다
굴러다니던 막돌에서 하얗게 난초꽃도 빠져 나오겠습니다.
<시작노트>
증거 인멸 때문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화분이 돌아온 것도 기쁜 일이지만
비록 꽃 도둑이지만 오래 부대낄 가책이 뿌리째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습니다.
그 빈자리에 대보름 달빛이 환하게 채워진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마음은 막돌과 다름없습니다.
1955년
경북 구미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 등단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2007 올해의 시 선정
2007 제3회 일연문학상
2004 김달진문학상
<시감상>
제 일터에 빌려다 놓은 시집 <시, 사랑에 빠지다> 가운데서 오늘은 장옥관님의 '허브 도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끝으로 슬쩍 건들기만 해도 진한 향기를 건네던 로즈마리 애플민트 페퍼민트향이 기억났지요. 살던 집을 떠나며 다음에 이사 올 사람을 위해 씽크대나 냉장고 문 위에 그간의 사용하던 것들에 메모를 남기는 주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지만, 도둑맞은 화분 자리에 저토록 다정다감한 글을 두었다는 얘긴 시인에게 처음 들었네요. 참, 본받고 싶은 마음이며 감화된 도둑이라는 생각을 해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