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식
달팽이 / 김철식
내가 퇴행을 각오하면서까지
너의 네 줄 가로무늬를 주술처럼
지니고 있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 몸 속 또 하나의 나인 너를
철갑으로 껴안고 있는 이 고집도 알 수 없다
오직 너의 예민한 촉각에 굴종하기 위하여
빛깔 없는 나의 노래는
허공을 흔들고, 단 한 순간
천년을 떨게 하는 오르가슴을 위해
그 황홀 같은 기절을 위하여
음지를 기어가며 너와 나의 살점을 뜯는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든
그것이 소통이 아니라 하든
아, 그것이 소멸이고 폐허라 하든
운명처럼 너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토하는 모든 슬픔이 네 안에 고임에야
하여, 장마철 나의 힘겨운 산란은
너를 위한 아름다운 퇴화가 되고
너의 네 줄 무늬는
치욕으로 잉태한 나의 기적이 된다
‘기억력 감퇴인가, 일시적인 착시인가, 내 오렌지색 칫솔을 깜빡 잊고서 아내의 분홍빛 칫솔로 이를 닦고 나오다, 아내한테 들켜버렸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래 정말.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젖은 입술을 닦고서 안방으로 쫓겨온 나는 화장대 앞에서 아내의 표정을 흉내내어 눈, 코, 입을 씰룩거렸다. 그러고 보니 칫솔은 밥 떠먹는 숟가락과 달라서 혼동할 수 없는 분명한 주인이 있다’. 김철식 시인의 시집 ‘내 기억의 청동숲’ 역시 내가 아니라 김철식 시인의 청동숲이었다. 나른한 오후의 한때, 그 청동숲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기억력 감퇴인지, 일시적인 착시인지, 시인은 수연통(水煙筒)을 입에 물고서 가무룩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아득하여라/그리움을 뚫고 지나가는 연기’를 뿜어대는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연통의 연기를 하염없이 피워 올리는 그의 모습은 소설가 이응준의 표현대로 실패한 혁명 같은, 굳은 모습이었다. 한나절을 그렇게 혼자 있기가 뭣해서, 나는 거실로 나갈게, 시집을 벌려놓고 나와버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제쳤고, 일전에 사온 돼지고기 그거 목살이지? 아내에게 아양을 떨었다. 다시는 오렌지색과 분홍색을 착각하지 않을게, 약속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을 매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데는 다리 밑이 적격이다 세상이 버린, 친구의 뼈가 강 밑바닥을 허옇게 적시고 있다 우리는 창우동 나루터 쓰레기더미 옆에서 돼지를 굽고 있었다…’(결국, 가지 못한 곳이 있다) 쩝쩝, 입맛을 끌어당기고 있을 때 시인의 청동숲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잠입해 들어갔다. 매캐한 그 청동숲에서 ‘개의 자서전’ ‘까치’ ‘달팽이’ ‘돌 줍는 여자’ ‘형수’ ‘비둘기’가 푸드득 눈물을 쏟고 나왔다. ‘언제부터/방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향긋도 하고 끔찍도’ 했다. 개의 자서전엔 ‘이빨 사이에 씹히는 罪의 흔적’이 있고, 까치는 ‘집 비운 사이에 늙은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들을 다 잡아먹는데 그것도 모르고’, 달팽이는 아름답게 네 줄 무늬로 퇴행하고, 돌 줍는 여자는 ‘밤꽃 향기에 말갛게 씻긴 어둠 곁에서 돌을’ 줍고, 형수는 ‘계집보다 나를 더 흥건히 젖게’ 하고, 비둘기는 ‘그들 안에 함정을 파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청동숲에서 나온 비둘기들의 무리와 함께 목살을 쪼아대고 있었다. 그 목살을 몇 줌 더 구웠으면 했는데 시간이 지나 고기가 다 탔다. 식당 같았으면 1인분 추가! 소릴 질렀을 테고 무엇보다 이 난장판의 설거지를 하는 수고로움을 덜었을 것이다.
내 오늘은 오렌지색과 분홍색도 제대로 구별 못했으니 설거지나 하지, 인심을 쓰면서 지금껏 구워먹던 프라이팬을 화장지로 씻어내는데, 시인의 청동숲, 청동 빛은 이보다 더 깊었던가, 뜨거웠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앗, 뜨거워, 분홍에 취해 엉뚱한 칫솔로 이를 닦고 그 목구멍으로 탐욕의 고깃덩어리를 날름날름 삼켰으니, 이제 그 그슬린 불순물을 부지런히 닦는 일도 내겐 소중하리라. 나는 청동 빛에 가까워진 그 프라이팬을 들고서…, 기억력 감퇴인가, 착시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한낮의 섹스’란 시의 고딕체로 된 구절, ‘어머니 당신 얼굴에/내 정액을 쏟아붓고 싶어요/당신 얼굴의 주름을 지우고 싶어요’ 때문에 그랬는지, 줄줄 화장지를 연속 풀어 그 프라이팬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청동숲은 한때 검게 그슬린 내 프라이팬보다 더 뜨거웠을 것이다. 목살로 목을 닦아냈으니 이제는 소리내어 그의 긴 시, 청동숲을 한번 읽어보자.
〈이기인/시인〉
문득
김 철 식
간밤에 내려 고인 빗물에
주름진 썩은 낙엽 몇 장이 떠 있다
아침이면 늘 나서는 길가에
문득 그 길로
가던 길을 벗어나
사홍리 등배에 오른다
곱사등이마냥 구름이 내려앉은 사이로
발걸음은 무슨 시늉을 좇는지
마음은 또 무슨 그늘에 가 있는지
너른 바위 위에 노인네 둘이 앉아 있다
말없이 손짓을 따라 옆에 가 앉으니
풍으로 고개조차 돌리기 힘든 여인네는
사내의 무릎에 손을 놓고 사내는
깊지 않은 산 아래로 시선을 놓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문득
그늘에 가 있던 마음이
붙들 곳이 없어져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어쩌다 오른 이 산길이
늘 나서던 아침 길과 다를 바 무어냐
눈먼 새마냥
온 길을 되돌아가는 하루, 문득
해설 이 광 호
화자는 "아침이면 늘 나서는 길" 을 떠나 '산길' 로 접어든다. 이 이탈의 행위와 내면적 상황을 시인은 '문득' 이라는 부사어 속에 압축한다. '문득' 이란 무엇인가? 일상의 시간과 궤도로 부터 벗어나는 우연한 행위에 관한 표현일 수 있다. 그 이탈의 산길에서 화자의 마음은 "또 무슨 그늘에 가 있는지"다. 그곳에서 만나는 유일한 사건은 "너른 바위 위에 노인네 둘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뿐. "풍으로 고개조차 돌리기 힘든 여인네는 / 사내의 무릎에 손을 놓고 사내는 / 깊지 않은 산 아래로 시선을 놓고 있다". 화자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더는 묻지 않았으며", 이 장면에 대한 인간적인 논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문득' "그늘에 가 있던 마음이 / 붙들 곳이 없어져 /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이 장면으로 부터 화자의 내면은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이면 늘 나서는 길" 과 "사홍리 등배" 는 무엇이 다를까? 화자는 "어쩌다 오른 이 산길이 / 늘 나서던 아침 길과 다를 바 무어냐"로 자문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는 세 번의 '문득' 의 계기를 만날 수 있다. 익숙한 길로부터의 이탈, 그 길에서 만난 노인네들과의 조우, 그리고 되돌아가는 길 위의 '문득'. 그러니까 화자는 단순히 일상적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문득' 은 "눈먼 새마냥 / 온 길을 되돌아가는 하루" 혹은 생의 시간의 다층적인 계기들을 새겨놓고 있다.
작가 소개
김 철 식
1967년 경남 사량도 출생.
1996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내 기억의 청동숲" 등.
『내 기억의 청동숲』 김철식 / 문학동네 그런데 이토록 부정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긍정적이고, 또한 폭력적이고, 광기적인 과거, 기억은 바로 그의 시 쓰기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의 전 생애를 형성해 온 과거, 유년 시절, 집, 동네, 어머니, 형수는 모두 과거의 기억의 한 편린들로 그의 기억의 “비좁은 하수구로 들어온 밥풀” 같은 존재들인데, 이러한 갖가지 과거, 기억은 시로 형상화되고, 끌고 당기는 고투 속에 이루어지는, 그러나 자력이 있는 시 쓰기의 고달픔으로 계승되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그의 시 쓰기는 고통스런 기억만큼이나 역시 비명에 가깝게 됩니다. 거머리떼 같은 시의 원동력, 바로 기억은 시인의 살점을 뭉텅 뭉텅 떼먹으며 성찬을 해치우고 날이 밝아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그의 시 쓰기 작업은 고달픔을 수반한다는 말이지요. 그 때문에 그는 누렇고 검은 기억의 공범자를 데리고 매일 밤 저승으로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억을 끝내고 싶어하는 그의 강렬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가 시 쓰기에 그토록 집착하도록 하는 광기의 피스톤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 기억이 도출하는 죽음과, 파괴의 욕망은 곧 역설적으로 그의 삶의 수단, 시 쓰기의 욕망이 되는 셈이지요. 물론 시와 격렬하게 고투하고 있는 시인은 고뇌의 대상을 직설적으로, 기억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격한 감정을 그대로 시를 통해 드러냅니다. 그의 기억은 “두뇌의 권능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곧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청동숲을 이룹니다. 그 청동숲은 훌륭한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데 많이 쓰이는 오동나무과의 청동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일 수도 있고, 지나간 과거의 유물로서의 무겁고 힘겨운 고철숲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숲이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방에 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억의 저장소에서, 시 쓰기의 고달픔 속에서 변방에 선 아웃사이더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거기서 진정한 핵심, 본질을 잊은 자로서 속세의 후미진 곳, 변방을 어슬렁대는 한 마리 개가 되어, 중앙이 되지 못하고 떠도는 담쟁이덩굴의 유목성이 되어 자학적으로 자서전을 읊어봅니다. 진정으로 짖어본 적이 없는 패륜의 생애를 말입니다. 부정과 염세와 회의가 뒹구는 세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땅 위의 길은 애초부터 그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 되며, 그 자신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존재가 되며, 쓰레기 무덤 안이 그의 거주지가 될 뿐이지요. 따라서 반항적인 아웃사이더가 늘 그렇듯이, 그의 표현방식 또한 폭력적이고 거칠고 자학적이고, 때론 상스럽기조차 합니다. 결국 제 살에 박힌 검은 기억을 덮기 위해 결코 유순해지지 못한 채 스스로 난폭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아웃사이더에게 미래란, 희망이란 왜소한 것이므로, 그는 과거에, 추억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데, 그가 집착하는 과거나 추억은 되풀이하여 곱씹을 만한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로 주먹 불끈 쥐고 나아가게 하는 한의 원동력이 됩니다. 아웃사이더의 힘은 바로 이런 변방인, 주변인으로서의 소외와 아픔과 상처에서 오는데, 이것은 오히려 삶과 희망에 대한 오기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고, 곧 발포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그의 힘은 점점 더 거세지는데, 이것이 강해질수록 그의 활력은 증가하고, 그 활력으로 그의 시는 능동적이고 힘있게 되어 갑니다. 이게 바로 그의 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거지요. 말하자면 반항아의 힘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사랑과 긍정에 대한 폭력이 되고, 그것이 그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되고 근원이 되는 동시에 시를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그 폭발적 힘이 분출해낸 역동적인 시라는 배설물, 그렇게 그는 남성적 카타르시스를 만듭니다. 거기서 그의 분노와 아픔은 해소되고 그나마 세상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되지요. 상처가 길을 만들었고, 길 밖에서 그는 스스로 자유로울 때까지 그 상처가 만든 아웃사이더로서의 울분들을 토해냅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이제 평온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반항과 반란 속에서도 한편으론 그렇게 갈망하고 목표로 삼던 사랑과 소통, 천년을 떨게 하는 오르가슴과 황홀 같은 기적을 찾아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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