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박형준<금광>

미송 2010. 12. 25. 11:22

금광 / 박형준

우물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물 위에 코스모스가 한가롭게 떠 있다
우물은 평지와 높이가 같다
빠져죽기에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다만, 실족이 어울린다

예전엔 이곳이 금광으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지금은 갈대가 사방을 조여오고
채굴은 끝나버렸다, 이미 수장된 지 오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우물에 침을 뱉고 떠난다.

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


시가 씌어지는 과정은, ‘나’가 먼저이고 ‘사물’의 풍경이 그것을 닮기도 하고, ‘사물’이 먼저 있어 ‘나’가 거기에 투영되기도 한다. 순서는 아무래도 좋다.

기억의 끝없는 반추를 통해 우리 시대의 빼어난 비극적 음화를 그려내는 시인이 박형준이다. 그의 시는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이자 그것을 풀어놓는 선착장이다. 폐광이 된 지점에 있는 죽은 우물, 그것은 “코스모스가 한가롭게 떠 있는” 풍경과는 대조되는 죽음과 마모 그리고 폐허의 현장이다. “모두가 죽지 않는 유년의 王國”을 꿈꾸는, 그리고 “적어도 모든 상상은 기억의 변용에 불과하다고 믿는" 박형준의 시에서 이러한 죽음(또는 소멸)의 이미지는 언제나 지배적인 자질로 나타난다. 그래서 절정에 도달한 순간 재빨리 늙어버리는 것이 그의 몸에 밴 비분절적 시간이다. 기억과 현재의 폐허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거니는 그의 시의 표정은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는 열망“의 반영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을 풍부하게 여러번 삶으로써 주체를 상상 속에서 소멸해가는 과정의 반영이기도 하다.

결국 소멸이란 완성이 없는, 끝없는 과정이 아닌가(그래서 그에게 성년은 끝없이 유예된다) 시인은 그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한 일“이라고 반어적으로 쓴다. 그가 그리는 자연의 체험은 그의 내면을 닮아 퇴색하고 결핍되고 침잠되어 있다. 아니 그 결핍이 그의 내면의 어둠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박형준은 현재에나 이곳에나 온통 부재한 것들만 시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싸안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억의 주체이자 대상이고, 동시적으로 한몸을 이룬 육체이다. 그가 ”허름한 가슴의 세간을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다 떠나 보내련다“고 노래할 때도, 그것은 바로 ‘가슴’과 ‘강물’ 곧 시선과 대상의 비분리상태를 욕망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처럼 내면과 대상의 상호조응을 전제로 하는 시에서 바라봄(관찰/응시)의 대상은 결국 바라보는 사람을 닮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에는 주객을 분리하는 ‘원근법’에 기초한 대상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유성호 평론가)  


<시감상>
가난한 농노들의 정신적 해방을 도왔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그가 노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그의 눈 안에 든 노란 지평선은 자신의 전존재를 뱉어내는 화이트홀 같은 지평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시를 읽으며 들었다. 詩<금광>은 김유정의<노다지>에 나오는 금 캐러 가세, 하는 금광 얘기가 아니다. 우물이 상징하는 무엇을 굳이 시로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저 시를 읽는 순간, 아- 하는 외마디 소리만 흘러나와도 광맥을 발견한 듯 한 소득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