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꿈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몇몇은 그 꿈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던 ‘운주사’라는 절이 있다. 천년 동안 누워 있던 와불이 일어서는 날이면 마침내 새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운주사는 실재하는 공간이기에 앞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황석영의 저 유명한 소설 ‘장길산’ 이 터를 잡은 곳도 바로 운주사다.
그러나 ‘혁명’은 끝내 오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혁명의 종가’가 무너지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선우 시인은 그 정황을 “우울한 내상의 날들”(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처럼 혁명의 가능성이 멀어졌다고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마저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시인이 새삼 운주사를 찾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가시연꽃을 찾아 단 한번도 가시연꽃 피운 적 없는 운주사
에 가네 참혹한 얼굴로 나를 맞는 불두, 오늘 나는 스물아홉 살.
십사만 칠천여 시간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나의 시간은
늙은 별에 닿지 못하고 내 마음은 무르팍을 향해 종종 사기
를 치네 엎어져도 무르팍이 깨지지 않는 무서운 날들이 만가
도 없이 흘러가네
운주에 올라, 오를수록 깊어지는 골짝, 꿈꾸는 와불을 보
네 오늘 나는 열아홉 살.
잘못 울린 닭울음에 서둘러 승천해버린, 석공의 정과 망치
티끌로 흩어졌네 거기 일어나 앉지 못하고 와불로 누운 남녀
가 있어 출렁, 남도땅에 동해 봄바다 물밀려오네
참 따뜻하구나, 물속에 잠겨 곧 피가 돌겠구나
걷지 못하는 부처님 귀에 대고 속삭였네 달리다쿰, 달리다
쿰!* 누가 자꾸 내 귀에 대고 소녀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지만
운주에 눕네 엄마를 기다리다 옷장 속에 숨어 홀로 든 낮
잠처럼, 오늘 나는 아홉 살.
낮꿈 밤꿈 지나 새벽꿈에 이른 나는 새끼손가락만큼 작아
졌네 더욱 넓어진 바닷속에 누워 바라보네 동해 깊은 물, 어
머니 몸속 어딘가 묻혀 있던 구근에서 꽃대가, 생살 - 물의
살을 찢고 솟구쳐 오르는 것을, 핏덩어리 꽃숭어리 - 태양
이 뜨는 것을
온 바다에 가시처럼 박혀 흔들리는, 문둥이 부처님들 사이
에 누워 울었네 울지 못했네 출생 이후 나는 잠들기 시작하
였으니 꽃을 벗어나고 있는 가시연꽃을 끝까지 바라볼 수 없
었으니.
* "소녀여 일어나라" 라는 뜻의 히브리어. 성서에는 예수가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 하자 소녀가 일어나 걸었다고 한다.
-김선우, 雲株에 눕다
달리다쿰(소녀여 일어나라)! 아무리 반복해서 외쳐도 운주사의 와불은, ‘나’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시인이 제 아무리 가시연꽃을 보고 싶어하더라도 운주사에 있지도 않은 가시연꽃은 실제로 볼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모두 불가능한 소망들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만큼 역설적으로 시적 화자의 소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마치 그 소망에 삶의 모든 것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화자가 긴 잠에 빠지는 것은 꿈속에서라도 그 소망들을 이루기 위한 시적 장치이다. 화자가 누워 잠이 드는 바닷속은 곡 어머니의 품이다. 스물아홉부터 열아홉을 거쳐 아홉으로 화자의 나이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는 새끼손가락만해졌다가 “핏덩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라.
“동해 깊은 물”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든 양수이다. “물의 살을 찢고”, “다시 말해 자궁의 양막을 찢고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은 화자 자신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핏덩어리 숭어리- 태양“으로 표현된 ”가시연꽃“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운주사의 와불들 역시 ”문둥이 부처님“이라 표현된 가시연꽃으로 환생한다. 시적 화자의 모든 소망들이 ”꽃을 벗어나고 있는 가시연꽃“이란 구절에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인에게 가시연꽃이란 한 여성으로서, 더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한 존재를 가리킨다.
시인은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 ‘출생 이후 나는 잠들기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또 ‘가시연꽃을 끝까지 바라볼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의 부끄러운 내면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에게 가시연꽃에 주목하기에 앞서 가시연꽃의 오랜 진화의 과정을 떠올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 자신이 최근 다른 작품에서 “뱀은 다리를 몸속에 가두는 데 일억 년이 걸렸다”(달디단 진물 : 시와 시학 2000. 여름)는 점을 언급했듯이, 자신의 현존재를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힘들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오랫동안 내 입 속에 갇혀 있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를 입 밖에 내고 싶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 ‘사랑의 거처’ 에서
문예연구 2000년 가을호 / 이성우(문학평론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거름을 줘야 한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신형철|문학평론가〉
김선우
여행 마지막날 나는 무료하게 누워 흰 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오래된 여관이 으레 그렇듯 사랑해, 내일 떠나 따위의 낙
서가 눈에 띄었다 벽과 벽이 끝나고 만나는 모서리에 빛바랜
자줏빛 얼룩, 기묘한 흥분을 느끼며 얼룩을 바라 보았다
두 세계의 끝이며 시작인, 모서리를 통해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다래순 냄새가 났다 다른 세상의 대기에 접촉한 순간
놀라며 내뿜는 초록빛 순의 향기, 머리를 받쳐준 그녀는 오
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의 눈 속에서 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으며 내가
말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선 온갖 냄새가 뿜어나왔다
포마이카 옷장의 서랍 냄새, 죽은 방울새에게서 맡았던 찔레
꽃 향기, 불에 덴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여름 소나기의 먼
지 냄새, 엄마의 속곳 냄새...... 세포 하나하나에 심장이 들
어선 것처럼 나는 떨었다
들어왔지만 들어온 게 아닌, 마주보고 있지만 비껴가는 슬픈
체위를 버려...... 탄성을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잘 마른
밀짚 냄새,허물어진 흙담냄새, 할머니 수의에서 나던 싸리
꽃 향기, 오월의 가두에 흩어지던 침수향을 풍기며 그녀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모든 시공이 얽혀 있는, 단 하나의 모서리로 그녀가 돌아
간 뒤,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맡았던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김선우 = 1970년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 힘 동인"
벌집 속의 달마
김선우
불영산 수도암에 갔다가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바탕 엉겼네
신랏적 부처님은 왜 그리 쎅시하냐고
슬쩍 농을 건넸더니 반개한 두 눈 스르르 뜨시네
'신라'라는 발음은 로맨틱해요
허리춤을 간질였더니 예끼, 손을 저으시네
천년 예술의 균형미 따위
선화공주와 서동방은 아랑곳않을걸요
아사달 아사녀의 달아오른 눈빛이
부럽지 않았나요 허허, 웃는 비로자나 부처님
아름다운 귓볼이 벌게지셨네
色卽是空을 설한 부처의 몸을 빌려
관능을 조각한 석공의 번뇌......
법당 앞 고즈넉이 서 있는 삼층석탑
금 간 탑신 아래 주먹만한 벌집이 매달려 있었네
천년 세월 돌꽃은 피고 지고
벌집 속으로 무상하게 드나드는 달마들
선남선녀 옷자락이 하염없이 스쳐가네
이 뭣꼬!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네
선운사, 그 똥낭구
-불혹의 누이 영덕 스님께-
김선우
선운사에 와
해우소 앞 은행나무 아래 잠시 앉았습니다
이상한 냄새에 내 뒤춤을 자꾸 흘끔거렸는데
갓 여문 은행열매가 피우는 냄새였습니다
애기똥냄새......달짝지근한,
저렇게 대기 속에 하초를 활짝 펼치고
배내똥 같은 열매를 길러낼 수 있다면
당신 생각이 생각났습니다
폐소공포증을 앓는 당신이 지하서울역에서
황급히 뛰어올라가 파하, 하던
그 계단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바랑을 지고 플랫홈을 들어서던
당신이 문득 그랬지요...썩자...
푹 썩어 맑은 물 한국자 우려낼 수 있다면
목어가 울립니다
짭조롬하니 곰삭은 목어 소리 속에
온갖 허드렛물 이윽히 발효시키는
선운사 이 똥낭구가 나를 때립니다.
<시와산책> 김선우의-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 |
살아 펄덕대는 생명성, 여성성
김선우(金宣佑·30)씨의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발행)은 살아 펄떡대는 시어(詩語)의 힘을 보여준다. 이제 너무도 흔한 용어가 되어버린 생명성, 여성성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풍요로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읽는 이의 눈 앞에 펼쳐진다. 「죽음」 이나 「종말」 이란 암울한 단어들로 한국 시의 상황이 요약되던 1990년대를 막 지나 세기가 바뀌고, 천년이 바뀐 시점에 참으로 반가운 신인의 등장이다. ---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 (2000년 2월 7일 월요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