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진영<쑤퉁(蘇童): 퉁소의 음악 혹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

미송 2011. 1. 12. 08:58

쑤퉁(蘇童): 퉁소의 음악 혹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

                                                                    김진영(철학자)


며칠째 불면이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눈을 뜬 거다. 나는 자려고 하지만 그 눈 뜬 것은  잠의 문지방을 지키면서 건너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반수면의 문지방 앞에서 서성이다 보면 헤매던 기억은 프루스트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나는 나의 불면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그 끝에 유년의 불면이라는 것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어린이 시간에 포의 <검은 고양이>를 방송극으로 들었거나 어머니를 따라 무서운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황량한 어둠 속에 구멍이 뚫리고 푸르고 검은 공동(空洞)의 입이 생겼다. 깊고 어두운 그 공동의 입은 점점 크게 다가오고 그만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얼른 다시 눈을 뜨는 일이 반복되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뒤척이다가 결국 베개를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갔다. 한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집 안에서 할아버지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 내게 할아버지는 위안이 아니라 겁을 주곤 했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떤 아이가 찾아올 거라고, 대문 밖에서 세 번 너를 부를 거라고, 그 아이를 따라가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 아이가 오기 전에 빨리 자야 한다고……. 나는 더 꼭 눈을 감는다. 검은 공동은 더 깊어진다. 나는 영락없이 빨려들 것만 같아서 기를 쓰고 버티지만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이번에는 그 안에서 부르는 소리마저 들리기 때문이다. 진영아 놀자, 놀자, 놀자…….
 

공동은, 부르는 소리가 들리던 깊고도 어두운 심연은, 여름이면 놀러가던 외갓집 마을에도 있었다. 방앗간이 있고 거기서 뒤로 돌아가면 키 큰 나무 그늘 아래 원형의 우물이 있었다. 몸을 붙이고 서면 가슴께가 닿을 정도의 높이였던 그 우물은, 정말 그렇게 깊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기억 속에서는 밑바닥이 안 보이도록 깊고 어둡다. 그 바닥 모를 깊이 때문일까, 아니면 어두운 수면 위에서 어른거리며 종잡을 수 없는 형상으로 변하곤 하던 빛 때문이었을까, 우물을 들여다보면 어떤 은밀하고 위험한 매혹이 몸을 끌어당기곤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볼 수는 없으니까 우 하고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소리를 대신 내려 보냈다. 그러면 대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우우우우……. 웅숭깊은 메아리가, 누군가가, 아니 여러 사람이 부르는 합창처럼 겹치고 섞인 소리들이, 안 보이는 심연의 밑바닥에서 되돌아오곤 하였다.
 
‘영화와 문학 사이’라는 제목으로 강의 요청을 받았다. 내게 할당된 영화와 소설은 장이모 감독의 <홍등(Raise the Red Lantern)>과 그 오리지널 텍스트인 쑤퉁(蘇童, 1963~ )의 『처첩성군(妻妾成群)』이다. 영화는 일찍이 보았지만 소설은 아직 읽은 바 없었다. 쑤퉁의 단편집이 마침 서가에 있어서 잠 안 오는 밤에 길지 않은 소설을 읽고, 한 번 더 읽고, 영화도 다시 보았다. 문학을 영화로 만들면 대체로 실패하고 만다는 평소의 생각은 이번에도 확인됐다. <홍등>의 경우, 꼼꼼하게 따지자면 많겠지만, 그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물을 옥탑방으로 바꾼 데 있다. 아마도 그건 내러티브를 박진감 있는 영상으로 바꾸기 위해서인 것 같지만, 옥탑방과 우물의 차이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영화와 문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처럼 여겨진다. 문학에는, 내 식으로 말하자면, ‘고향 무의식’이 있는데 『처첩성군』의 경우, 그 곳은 다름 아닌 보랏빛 꽃이 피는 자등나무 곁의 오래된 우물이다. 영화에는 어쩌면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의 바닥에는 이 우물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게 나의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러면 이 우물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홍등>은 쑤퉁의 소설을 생존의 암투를 벌이는 처첩들의 이야기로만 재구성한다. 그러니까 <홍등>은 이 소설을 끌어가는 두 운동 중에서 하나의 운동만 화면으로 옮긴다. 그 운동은 저 돈 많은 나리님에게로 수렴되고 집중되는 처첩들의 순응적 운동이다. 그 운동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모함하고 저주하면서 나리님의 아들을 낳을 때만 보장되는 생존투쟁을 벌인다. 그렇게 <홍등>은 궁중과 대갓집의 여인 잔혹사 위에 그 압력을 못 견뎌 미쳐 버리는 한 여인의 정신분열을 포개어서 어쩌면 스테레오 타입적인 내러티브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또는 정치 비판적으로(이건 <홍등>이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의미화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여성 잔혹극은 문화 권력이 제공하는 해석의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확대 재생산할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단지 피지배계급으로만 응시하면서 심미적 연민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여성 잔혹사의 모델은 인간주의의 이름을 앞세우기는 해도 사실은 그 여성 잔혹사의 이면에서 태동하고 숙성되는 알레고리적 긍정의 힘을 중화시키거나 망각시키는 데 일조를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처첩성군』의 문학은 어떤가. 소설 『처첩성군』 속에는 <홍등>에는 없는 또 하나 운동의 궤적이 있다. 그건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는 암투 가운데 여자들이 역설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결탁하고 융합하는 무의식적 동일화의 흐름, 강요된 생존투쟁을 순응적으로 수행하지만 그 수행 과정 속에서 여성 잔혹사를 거스르며 흘러가는 역저류(逆低流)와 같은 운동의 궤적이다. 그런데 이 역저류는 쑤퉁의 소설 안에서 내러티브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흐른다.  
 
 
『처첩성군』에는 세 개의 소리가 존재한다. 우선 퉁소의 소리가 있다. 소설 속에서 퉁소는 부자의 소유물이지만 퉁소의 본래 주인은 부자가 아니다. 그는 부자에게 패배한 어느 한 가장, 파산하고 저수조에서 동맥을 끊어 죽은 쑹렌의 아버지다. 쑹렌은 말하자면 퉁소의 적법한 상속자다. 하지만 쑹렌은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간직하고 어느 날 부자 나리 천 씨 저택의 ‘서쪽 후문’으로 들어와서 그의 네 번째 첩이 된다. 그리고 곧 처녀성과 함께 퉁소를 빼앗긴다. 사실은 처첩들보다 더 지독한 질투와 시샘 덩어리 스놉인 부자 나리가 쑹렌의 퉁소를 옛 애인의 선물인 줄 오해하고 태워 버리기 때문이다(권력자는 누구인가. 그는 소리를 빼앗는 자라고, 소설은 말한다). 태워 버린 퉁소는 그러나 없어지지 않고 부자의 아들에게로 부당하게 상속된다. 마음이 여리긴 해도 비겁한 인텔리겐차일 뿐인 부자의 아들이 퉁소를 불면 쑹렌은 가슴이 저려 와 눈물을 못 참지만 정작 통소를 배우라는 제안은 거절한다. ‘배우기도 전에 빼앗겨 버린’ 퉁소는 이미 그녀의 악기가 아니니까. 아무리 소리가 아름다워도 퉁소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수습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담아낼 수 없는 빼앗긴 악기일 뿐이니까.
 
하지만 소설 속에는 또 하나의 퉁소가 있다. 그건 세 번째 첩인 메이산이 부르는 경극의 노래다. 처녀성을 빼앗기던 날 쑹렌은 경극 배우였던 메이산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부당한 첫경험의 아픔을 통해서 ‘어둡고 깊은 곳’으로, 몸속의 우물 속으로 추락할 때, 쑹렌은 배 위에 올라탄 나리님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는 메이산의 한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 새벽,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서 밖으로 나간 쑹렌은 ‘아름다운 귀신’처럼 춤을 추는 메이산의 자태 앞에서 ‘영혼이 모두 날아갈 것만 같아’ 눈물을 흘린다. 메이산은 자기 노래를 듣고 눈물이 가득 고인 쑹렌을 알아보고, 쑹렌은 새벽 서리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풀’처럼 자기에게 걸어오는 메이산을 알아본다. 새벽 경극의 노래 속에서 쑹렌과 메이산은 두 첩이 아니라 두 여인으로 서로 만난다.
 
서로를 알아보는 건 그런데 첩과 첩만이 아니라 첩과 그 첩의 종년이기도 하다. 쑹렌의 몸종이면서 쑹렌처럼 나리님의 첩이 되기를 꿈꾸는 예얼은 자기의 꿈을 먼저 가져가 버린 쑹렌을 시기하고 저주한다. 가슴에 바늘들을 꽂아서 자기를 저주하는 고(蠱)를 발견한 쑹렌은 발칙한 종년에게 똥 묻은 휴지를 삼키게 하고 예얼은 장티푸스를 얻어 죽는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진 예얼이 죽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건 나리님이 아니라 쑹렌의 이름이다. 왜일까? 죽은 예얼은 복수를 하기 위해 쑹렌을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머리가 훌렁 벗어진 예얼이 창문을 툭툭 밀며 들어와도 씅렌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귀부인처럼 둥근 쪽을 찐 예얼이 긴 비녀를 뽑아서 쑹렌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쑹렌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어둡고 깊은 곳으로 빠르게 추락한다’. 서사는 이 에피소드를 복수라고 말하지만, 소설은 때로 거꾸로 말하고 독서는 그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소설을 소리의 궤적을 따라서 읽으면 복수의 에피소드는 더 이상 처첩들의 잔혹극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질화되는 화해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래서 쑹렌은 ‘조용히 누워서’ 예얼에게 가슴을 맡기고, 예얼은 금비녀를 뽑아 깊이 찔러서 ‘차갑게 얼어붙은’ 쑹렌의 가슴에 구멍을 내 준다. 그 구멍을 통해서 쑹렌의 가슴은 방혈을 하고 숨통이 터지고 비로소 소리를 얻는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해후하는 복수의 알레고리 안에서 쑹렌과 예얼 또한 더 이상 첩과 종년이 아니라 두 여인으로 만난다.         
 
『처첩성군』에는 세 개의 소리가 있지만 그 소리들은 모두가 한 곳에서 나온다. 그 곳은 자등나무 아래 우물이다. 우물은 말하자면 부당하게 빼앗긴 통소들의 장소다. 그래서 그것이 금력이든 권력이든 부당한 세력에게 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모두 이 곳으로 모인다. 부정을 들키고 살해당하는 메이산도, 첩이 되려다가 염병에 걸려 죽는 예얼도, 이들에 앞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죽은 모든 처첩들도(그런데 이들이 어디 처첩들뿐일까) 모두 이 곳으로 집결한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자기들처럼 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부르고, 소리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이들은 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쑹렌도 퉁소를 빼앗기던 날, 아직은 그 목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이 부르는 소리를 느낌으로 듣는다:
 
“후원 담 모퉁이에 자등 한 그루가 있었다. 그녀는 자등 아래 있는 우물에 눈길이 끌렸다……. 우물가에 가 보니, 우물둔덕의 석벽에 파란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쑹렌은 허리를 숙여 우물 속을 살폈다. 쑹렌은 자기 얼굴이 물속에서 일렁이는 걸 보고, 가쁜 숨소리가 우물 속으로 빨려들어 커지는 것을 들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마를 나는 새처럼 날렸다. 그 때 그녀는 어떤 서늘하고 딱딱한 느낌이 돌처럼 자기 몸을 천천히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남쪽 곁채로 돌아와서 다시 자등나무를 돌아보니까 갑자기 꽃 두세 떨기가 떨어져 내렸다. 쑹렌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쑹렌은 그 부르는 소리를 또렷한 목소리로 듣는다:
 
“우물은 여전히 은밀하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쑹렌은 우물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몸은 꿈속의 길을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무슨 식물 썩는 냄새가 우물 사방에 가득했다……. 쑹렌은 자신이 바람에 꺾인 꽃 같다고 느끼며 힘없이 몸을 숙여 우물 속을 응시했다. 또다시 현기증이 일어나고, 그녀는 우물물이 요란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고막을 파고들었다. 쑹렌, 내려와. 쑹렌, 내려와…….”
 
쑹렌은 내려간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메이산이 우물에 던져지던 밤, 비명을 지르다가 미쳐서. 그런데 미친다는 건 뭘까? 소설은 말한다. 그건 ‘토끼가 죽으면 여우도 덩달아 슬픔에 빠지는’ 거라고, 토끼를 쫓던 여우가 토끼가 되어 토끼를 따라가는 거라고, 토끼와 여우가 서로를 알아보고 그 어느 다른 세상으로, 소리를 빼앗아 가는 인간요괴들의 세상이 아니라 빼앗긴 소리들이 모여 있는 요괴인간들의 세상으로, 그러니까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오래 전 유학 시절, 베를린에서 고대 중국의 유물전이 있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옹관(甕棺)’이라는 걸 보았다. 고대인들이 관으로 썼다는 입이 막힌 토기 항아리인데 그 밑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상했다. 캡션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옹관은 어린아이를 묻던 관이라고, 죽은 아이가 엄마가 그리울 때면 찾아오라고 작은 구멍을 뚫어 놨다고, 어린아이의 관으로만 쓰이던 옹관이 언젠가부터 어른들의 관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그래도 구멍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외갓집 우물을 기억하면 사실인지 상상인지 모를 사건 하나가 덩달아 떠오른다. 외삼촌 아들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간질병이 있어서 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도둑질도 하고 사람도 때리면서 소년원을 드나들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자세한 사정 얘기를 들었다. 그 아이에게 본래부터 간질병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날 우물에 빠진 다음부터 그만 간질 발작이 생기고 말았다는 얘기를. 그런데 방학 때마다 내려가서 함께 놀던 기억은 있어도 얼굴은 이미 지워져 버린 그 아이를 생각하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건 너무 깊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어린 나의 모습이고 그런 나를 끄집어내려다가 대신 우물 속으로 빠지는 그 얼굴 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이 장면이 사실인지 상상의 가공인지 나는 확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친 쑹렌이라면, 무대 위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경극 배우인 메이산이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람과 귀신이 따로 없는데 꿈과 생시가 따로 있겠느냐고.   
 
불면의 밤, 눈을 감으면 어둡고 깊은 동공은 지금도 감은 두 눈 안에서 입을 연다. 그러면 우리 집 문 밖에서 내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옹관의 아이가, 나를 끄집어내고 대신 우물 속으로 떨어진 외삼촌의 얼굴 없는 아들이 기억난다. 이제는 나도 우물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걸까? 


 


《문장웹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