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진영<C. 매컬러스 : 슬픈 카페의 노래 혹은 혹 속의 노래>

미송 2011. 1. 30. 12:56

 

C. 매컬러스 : 슬픈 카페의 노래 혹은 혹 속의 노래


 

김진영(철학자)




Carson McCullers


수요일 저녁마다 소설 읽기를 한다. 이번 학기 수업의 테마는 사랑이다. 오늘은 C.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The Ballad of the Sad Cafe')>를 읽는다. 물론 이 소설은 ‘매컬러스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형적 사랑의 논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사랑의 논리와 더불어 내가 주목하는 건 소설 속에 배치된 공간들, 더 정확히, 그 공간들의 이동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 안에는 세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카페의 공간, 밀실의 공간, 혹의 공간. 이 공간들은 매컬러스적인 기이한 사랑의 동선을 따라서 이동하면서 작품을 중층적으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그 공간들과 이동의 궤적은 나의 오래된 공간 판타지를 다시 불러내기도 한다.    
 
나의 유년 안에는 ㄷ자형 한옥이 서 있고 그 오래된 한옥 안에는 세 개의 공간이 있다. 기억할 때마다 차례차례 돌아오는 그 공간들 중에서 제일 앞장을 서는 건 작은 별채의 앞마당이다. 이 공간은 분명 별채라는 이름의 사적 공간이었지만 문이 없고 길가로 마당이 열려 있어서 골목 안 아이들의 공유 공간이기도 했다. 악쓰며 놀던 골목 안 아이들도 어스름이 앉을 즈음에는 지쳐서 이 공간으로 모여 앉았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꾼은 거의 언제나 나였다)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읽은 먼 전설, 삼촌을 따라가 구경했던 서부영화, 은밀히 훔쳐보았던 어른들의 이상한 세상……. 저녁 어스름은 점점 짙어 가는데 아이들의 두 눈은 점점 빛나곤 했었다. 그리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하나씩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하지만 나는 쓸쓸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혼자 남은 그 공간 안에서 나는 오히려 행복했다.      
 
두 번째 공간은 대문과 중문 사이에 있었던 작은 사랑방이다. 친척이나 모르는 손님이 찾아오면 하룻밤 묵어가던 그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나중에 가난한 대학생이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 곳에 머물 때까지 그 곳은 나 혼자만의 놀이방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오래된 책들을 찢어서 종이딱지를 접거나 갖가지 구슬들을 정리하다가 심심해지면 동화책을 읽었다. 그러나 내가 그 방에서 더 열중했던 건 책읽기가 아니라 엿듣기였다. 사랑방은 길가에 면해 있었고 작은 들창으로 거리의 소음이 쉬지 않고 흘러 들어왔다. 모르는 목소리들이 엇갈리면서 이어지다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그 거리의 소음은 늘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방 안에서 동화책보다 더 행복했던 건 그 거리의 신기한 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그 어지러운 소음의 거리로부터 내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혼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마지막 공간은 내가 ‘뒷마루 공간’이라고 부르는 이름 없는 공간이다. ㄷ자의 한옥은 또 하나의 ㄷ자 담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그 두 ㄷ자 사이에는 나무판을 깔아 놓은 마루 공간이 있었다. 오래된 가구나 잡동사니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던 그 집과 담 사이의 공간은 어린 내가 누워서 겨우 옆으로 한 번 구를 수 있을 만큼 좁았다. 그 곳은 늘 어둡고 서늘했다. 나는 자주, 특히 아무도 없어 집 안이 고요할 때면, 그 뒷마루 공간으로 잠입해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늘하고 어두운 공간의 알 수 없는 대기를 숨 쉬면서 반듯이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곳에서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졌고 밤이 깊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서 온 동네를 헤매던 어머니는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고 집으로 와서야 나를 찾아냈다(어머니가 나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온 나를 어머니가 발견했을 뿐이다). 이놈아, 그 관 속 같은 데는 뭐하려 기어 들어간 거야……. 어머니는 울면서 안하던 매질을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나를 꼭 껴안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분명히 그 안을 찾아봤는데 왜 널 보지 못했을까?
 
이후 내가 실종되었던 뒷마루 공간은 나의 공간 판타지의 원형이 되었다. 나이 들어 난장의 세상에서 곤비한 생과 대결할 때마다 나는 어떤 공간을 그리워했고, 그러면 기억 속에서 공간 이동을 했다. 별채 앞마당에서 사랑방으로, 사랑방에서 뒷마루 공간으로. 물론 그 폐쇄적인 공간 이동은 뿌리 깊은 나의 숨기에의 강박과 태생적인 도피 본능을 드러낸다. 하지만 숨기가 도피가 아니라 열정이라는 걸 가르쳐 준 두 사람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M. Proust」, Ralph Bruce, 1974



M. 프루스트의 침실은 유명하다. 서른다섯이 되던 해 그는 스노비즘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침실 안으로 숨어들었다. 네 벽을 코르크로 도배하고 커튼을 세 겹으로 만들어 세상의 소음과 빛을 차단한 밀폐된 침실은 이후 14년의 남은 생 동안 그의 유일한 세계가 되었다. 그는 자주 자신을 노아로, 자신의 작업실을 노아의 방주로 비유했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노아는 성경 속의 노아가 아니었다. 마침내 대홍수가 지나간 세상에서 비둘기가 풀잎을 물고 돌아왔을 때 하느님의 신실한 종 노아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서 기뻐한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노아는 오히려 이렇게 한탄한다: ‘비둘기가 풀잎을 물고 돌아왔을 때 노아는 한없이 슬펐다. 이제는 행복했던 방주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지만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방주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프루스트의 노아는 방주 안으로 더 깊이 숨었다. 처음에는 살롱으로 외출도 하고 여름에는 휴가도 떠났지만 말년의 몇 년 동안 프루스트는 자신의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나 알듯이, 그 방주 안에서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Alberto_Giacometti」, Cartier Bresson



H.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한 장이 있다. 죽기 몇 달 전의 A. 자코메티를 찍은 사진이다. 이슬비가 내리는데 그는 지금 정지선을 밟으면서 물 젖은 차도를 건너가는 중이다. 사진 공간을 수직으로 이분하는 굵은 가로수, 오래된 건물과 넓은 차도를 나누는 수평 분할, 그 수직과 수평의 접점에서 사선으로 그어지는 차도 위의 정지선, 그리고 걸어가는 자코메티를 사이에 두고 충돌하는 음영의 대치 - 빛과 선의 기하학적 순간을 포착하는 이 사진은 브레송의 대가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결정적 순간’의 미학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건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 위에 외투를 뒤집어쓴 자코메티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그가 찾아가고 있는 장소가 길 건너의 작업실이라는 사실이다. 자코메티의 작업실도 유명하다. 그는 몽파르나스의 작업실을 40년동안 떠나지 않았다. 한때 초현실주의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는 곧 자신의 밀실로 숨어들었다. 아라공, 브레통, 사르트르, 장 주네……. 그의 주변에 친구들은 많았어도 그의 작업실 안으로 초청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프루스트가 그랬듯 말년에 자코메티는 모든 주변 사람들과 단절하고 작업실에만 파묻혀 살았다. 그런데 그는 그 작업실 안에서 무엇을 했던가. 그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가늘고 길게 최소한의 공간으로 축소되는 사람들, 고독의 소실점으로 마지막까지 수렴되는 사람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가 서 있지 않고 걸어간다. 그의 거의 모든 조상들은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허름한 코트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길 건너 작업실을 향해서 비 내리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자코메티 자신처럼 작업실 안에서도 자코메티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끝없이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Three walking men」, Alberto Giacometti



생이 공간 이동이라면 그 동선은 두 가지일 것이다.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거꾸로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의 이동이 그것이다. 물론 생은 리비도 운동이니까 타자의 공간으로 전개되고 확장되면서 열리려고 한다. 하지만 이 열린 공간으로의 동선이,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 더는 열리지 못하고 막힐 때가 있다. 물론 그래도 생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멈출 수 없다). 그래서 생은 때로 방향을 바꾸고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열린다.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 내가 눈여겨보는 건 다름 아닌 이 공간 이동의 변증법이다. 처음에 이 소설의 공간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이동한다. ‘술도 문 밖에서만 살 수 있는’ 폐쇄 공간이었던 미스 아말리아의 카페는 어느 날부터 ‘저녁마다 흥청거리는 열린 공간’으로 변한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꼽추 라이먼이 그 폐쇄 공간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그런데 꼽추란 누구인가? 그는 혹의 공간, 소설 속에서 가장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이 열린 카페로의 공간 이동은 카슨 매컬러스적인 그로테스크한 사랑의 율법 때문에 결국 중단된다. 매컬러스적인 사랑은, 그녀가 쓴 또 다른 소설의 이름을 빌려 말하자면, ‘외로운 사냥꾼’의 사랑이다. 사냥꾼은 사냥을 피할 수 없다. 사랑의 사냥꾼은 (그런데 그 누가 사랑의 사냥꾼이 아닌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물을 사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매컬러스의 사냥꾼은 그 사랑의 동물을 포획할 수가 없다. 그녀의 사랑은, 외로운 사냥꾼의 사랑은, 타자에게로 나아가기만 하고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타자의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스 아말리아는 꼽추를, 꼽추는 마빈 메이시를, 마빈 메이시는 다시 미스 아말리아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거절당하는 사랑이다. 매컬러스의 사랑 안에는 ‘하기’만 있을 뿐 ‘받기’는 없다. 이 가엾고 그로테스크한 사랑은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C. 매컬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받는 일을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나아가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받기에의 두려움을 메컬러스는 정신분석학의 모델로 설명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사랑의 문화사회학이 더 많은 설명을 해 준다. 세상은 사랑이 실현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두려워한다). 굳이 푸리에와 바르트를 빌려 말하지 않아도, 소위 세상이라고 불리는 자본과 권력의 판타스마고리아는 정말 사랑이 실현되면 '지금 이 상태(status quo)'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문화는 만들어지고, 그 사랑의 문화 안에서 사랑은 실현이 아니라 언제나 상처와 교환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냥꾼은, 사랑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사랑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이 매컬러스적 그로테스크한 사랑의 사회적 성격이고, 동시에 왜 그녀의 주인공들이 모두 기형인가를 설명해 준다. 매컬러스의 소설들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형이다. 미스 아말리아의 다리에서는 검은 털이 자라고, 꼽추의 혹은 나날이 커지고, 마빈 메이시는 갈수록 망나니가 되어 간다. 그런데 사랑은 다름 아닌 그 기형성 때문에 불이 붙는다. 미스 아말리아는 ‘긴 갈색 손가락을 내밀어 꼽추의 등에 솟은 혹을 만지며’ 사랑으로 빠진다. 꼽추는 마빈 메이시의 사악한 눈빛에 첫 순간 사로잡히고, 마빈 메이시는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다 버린 채 ‘키가 팔 척이나 되고 눈이 사팔뜨기’인 미스 아말리아를 짝사랑한다. 이 사랑의 에피파니적 순간은 그런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기형 - 그건 상처의 상흔이고, 또 그 상흔은 사랑했었음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표적 앞에서 사랑이 불 붙는 일이 왜 이상한가?
 
하지만 이 사랑은 다시 매컬러스적으로 저주받은 사랑의 주문권 안에 갇힌다. 사랑하기의 운명은 사랑받기의 두려움 때문에 앞이 막히고, 사랑 때문에 열렸던 카페는 사랑 때문에 폐쇄된다. 사랑의 동선은, 생의 동선은, 방향이 역전된다.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역설적으로 열린다. 꼽추는 떠나고, 미스 아말리아는 혼자 남는다. 그녀의 회색 사팔 눈은 ‘마치 슬픔과 고독의 눈빛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찾는 것처럼 나날이 가운데로 모이면서’ 외눈박이가 된다. 매일 밤 현관 앞 계단에 앉아서 꼽추를 기다리던 미스 아말리아는 사 년째 되던 어느 날 목수 하나를 고용해서 ‘카페를 판자로 둘러쳐 서’ 캄캄한 밀실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 다음 ‘두 번 다시 그 폐쇄된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그러면 그녀는 지금도 그 밀실 안에서 살고 있다는 건가? 소설은 그 후 미스 아말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이 나의 독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녀는 밀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그 곳에 없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 밀실에서 또 어딘가로 떠나갔는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곳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어느 곳이라는 건 안다. 오래 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모르는 여자와 도시의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해가 쨍쨍한 대낮인데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여자가 주얼리의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보석들 속에서 박제된 새 한 마리가 새카만 눈을 반짝이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쇼윈도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지루해서 돌아본 거리는 어느 사이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가로등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여자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긴 중심가의 끝은 지하보도였다. 계단을 밟으면서 땅 밑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작고 어두운 방 안에 우리 둘만 있었다. 나는 등 뒤에서 여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돌아앉은 여자는 자꾸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침내 속옷마저 벗기고 나는 등 뒤에서 힘껏 여자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흰 등 위에 박처럼 커다란 혹이 솟아 있었다. 그제야 여자가 부르는 노랫말이 또렷하게 귀 안으로 들어왔다: 혹 속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요, 혹 속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요…….
 
《문장웹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