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부채선 (扇) - 집속에 든 날개>
부채선 (扇) - 집속에 든 날개
이 바람은 어디에서
내 몸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갑자기 깨어날 때가 있다. 내가 속한 공간이 어떤 일렁임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돌연 받게 되는 순간, 갑자기, 화들짝 깨어나는 공간의 존재감 앞에 무릎꿇게 될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불현듯 닥친다. 아지랑이 일렁이는 봄들판에서 문득 닥쳐오기도 하고 어깨를 스치며 떨어진 낙엽 한 장을 무심코 집어든 순간 닥쳐오기도 한다. 어깨를 스치며 떨어진 낙엽 한 장의 그 파르르한 감촉이 돌연 깨우고 가는 공간의 느낌, 그런 순간의 뜻밖의 황홀 앞에서 존재는 갑자기 깨어나거나 잠든다.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탄식한다. 어느 쪽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일렁인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르게, 그러면서 조금씩은 비슷하게 그런 순간들은 닥쳐온다. 이 여름을 지나면서 나는 하릴없이 무료한 어느 오후들에 가끔씩 그런 순간들을 만나곤 했다. 여름 한 계절 나를 깨운 그 순간들에 무슨 특별한 사건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엔 대나무 편에 한지를 곱게 바른 쥘부채 하나가 있다. 이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문득 탄식한다. 그러고선 혼자 쿡쿡, 열적게 웃는다. 이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라니! 탄식의 내용도 형식도 참으로 고답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탄식의 순간 내가 간절하게 일렁거렸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한여름 대낮의 구름들이 무료하게 흘러가는 어느 시간에,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부채를 집어들어 길게 몇 번 부쳐보는 순간, 갑자기 내가 놓인 공간이 깃을 치듯 푸드득 깨어나는 신비, 홀로 있던 빈방의 적요로움이 아연 술렁거리는 흥성스러움 속에서 나는 갑자기 아이처럼 묻곤 했다. 도대체 이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별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있어온 수소나 산소 등속의 무수한 원자들이 이 별을 돌고 돌다가 지금 내 방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아주 늙은 공기의 입자들이 새로운 파동의 에너지로 막 탄생하거나 젊어지는 비약의 순간에 내 사소한 부채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별안간 들이닥칠 때면, 지상에 참으로 사소한 것이란 없는 것이다. 태초의 대기를 이루었던 것들이 더러 지구 대기권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지구 자체가 소멸하지 않는 한 태초의 것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의 생과 함께하는 법이다. 나는 느릿한 부채질이 깨워놓은 공간 속에서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내가 놓여 있는 공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느닷없는 확신 속에서 내 몸은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몸들과 함께 낮별들을 세기 시작한다. |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
해거름녘 산책을 마치고 어슬렁어슬렁 돌아온 길이다. 낮 동안의 햇볕은 아직 무덥지만 해 떨어지고 나면 대기의 기운은 선뜻 가을로 향해 있다. 밤마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살갗이 소슬해지는 바람이 팔뚝을 간질이며 지나간다. 어느 틈에 씨르씨르르… 쓰르쓰르르… 땅속에서인 듯 공기 속에서인 듯 큰 나무의 깊은 몸 속에서인 듯 아주 미세한 가을벌레들의 날개 부딪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순환하는 계절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지복한 일이다.
순환하는 계절의 틈에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임해지는 명상의 집이 있다. 계절과 계절의 틈새에 자리한 그 명상의 집은 외떨어져 앉은 움막이거나 조촐한 초가이거나 너와를 올려놓은 귀틀집 같은 것에 홀연 가깝다. 혹은 풀대궁에 흰 거품으로 지어놓은 벌레집 같은 것이랄까. 자기의 감각을 존중하며 살 줄 안 사람은 계절의 틈새에서 은자가 된다. 일상의 속도 속에서 아주 잠시 스쳐가는 머뭇거림이라고 하더라도 아, 봄이구나! 아, 가을이구나! 하는 감탄사를 마음속에 모실 때, 그렇게 잠시 멈추어 앉아 있을 때, 그 말들은 미처 표현하기 힘든 어떤 그리움과 안타까움까지 품고 명상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순연해지고, 근원을 그리워하는 단순하고 고독한 존재로 돌아간다. 아, 이 여름도 가는구나. 마음으로 중얼거리며 책상 한켠의 부채를 집어든다. 우리집엔 선풍기가 없다. 네 성정에 에어컨 없는 건 이해할 만하다만 선풍기까지 없냐? 아주 드물지만 여름철 들르게 된 벗들의 타박에 부채를 내밀어보인다. 내가 주로 쓰는 부채는 대나무 편에 흰 한지를 바른 쥘부채다. 경우에 따라 손끝에 이력이 붙은 장인이 만든 것도 있지만, 어느 허름한 시장통에서 찾아낸 이삼천원짜리 부채를 여름내 쓰기도 한다. 장인의 손을 거친 부채가 쥐고 펴는 손맛이나 이따금 부채를 펴거나 접어놓고 그 태를 무심히 살펴갈 때의 즐거움을 더하긴 하지만, 내게 부채는 장식용이 아니라 구체적 소용의 요구로 오는 것이어서 나는 부채의 외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까다로운 편은 아니다.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 이 바람의 다채로우면서도 풍부한 감성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부채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느 해 여름 깊은 산사에서 한여름의 가장 무더운 때를 부채와 함께 난 후 내가 가지고 있던 낡은 선풍기가 고장난 것을 시점으로 나는 다시 선풍기를 사지 않게 되었다. 그후로 내내 선풍기 없이, 물론 에어컨은 더더욱 없이 쥘부채 하나와 여름나기를 하곤 한다. 퍽이나 더울 때엔 땀도 좀 흘리면서, 흐른 땀을 느릿느릿한 부챗바람으로 달래듯 식혀주면서.
나는 에어컨을 싫어한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에어컨은 우리 생활에 일상화된 가전제품들 중 내가 유독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다. 내가 가진 에어컨 혐오증은 의식적인 것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즉물적인 반응에 속하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날 길을 걷다가 길 쪽으로 나 있는 에어컨 송풍구들을 지나쳐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무더위에 지쳐 길을 걷다가 에어컨 송풍구가 내뿜는 후끈한 열기마저 가세하는 지점들을 지날 때면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고 왈칵 짜증이 난다. 한여름의 무더위에 냉방기가 내뿜는 열기까지 더해지면 도심은 그야말로 찜통이 된다. 찜통이 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더 서늘한 냉방의 심리적 욕구를 지니게 되는 악순환의 폐쇄성이 아찔하다.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공건물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집집마다 에어컨을 달아놓은 고층 아파트의 그 단호하고 폐쇄적인 속내는 현대라는 난파선의 이기적인 속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해진다. 내가 사는 곳만은, 내 아이에게만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에어컨 광고들을 볼 때에도 마음이 불편해진다. 한 대로도 모자라 방마다 에어컨 필요하시죠? 라며 상냥하게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들을 볼 때면 상품의 소비를 위해 강요되고 조장되는 소비의 수동성에 진절머리가 난다. 사실 에어컨의 소비는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조장된 분위기에 의해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 같은 기후 환경에서 추위에 대한 난방의 요구에 비하면 더위에 대한 냉방의 요구는 견딜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닌가. 질퍽하게 땀을 흘려보지 않고 여름을 나는 냉방 도시의 사람들이 선풍기 한 대로도 족했던 시절의 사람들에 비해 풍요로운 여름나기를 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
부채 다비
부채를 부치는 방식은 그날 그 시간의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발현한다. 뭔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땐 짧은 간격으로 부채를 급하게 여러 번 부치게 된다. 풀리지 않는 생각의 매듭이 있을 땐 쫙 편 부채로 이마를 톡톡 치거나 접었다 폈다 부치다 말다 하며 부채의 독백이 길어진다. 마음이 한가한 날엔 부채질 역시 한가하고 느릿느릿하게 간격이 큰 진자처럼 움직이게 된다. 부채가 손에 들려 있는 그 순간의 마음의 상태는 부채를 쥐고 다루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나는 때로 부채가 내 마음의 어떤 매듭을 진단하고 풀어주는 주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하고 표현해야 한다. 부채는 말이 없지만, 부채를 통해 내가 표현한 마음의 상태는 무의식 중에 일차적인 치유의 과정을 겪는 셈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이 표현의 양식은 내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버튼 하나로 작동하는 기계와 벗할 때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에어컨 앞에서 나는 에어컨이 조절하고 뿜어주는 바람을 쐬는 수동적인 객체에 지나지 않지만 부채를 쥐고 있을 때 내 의식/무의식이 부채를 다루는 여러 가지 형태는 내 행위와 더불어 나를 조율하는 능동의 영역에 있다. 무엇 때문인가로 엉겨 있던 마음도 여러 번의 짧고 다급한 부채질을 통과하다보면 다소 느슨해지고 느릿한 리듬을 찾게 된다. 한 십 년간 선풍기를 가져본 적 없는 나는 이 기간 동안 세 번인가의 부채 다비식을 가졌던 것 같다. 여름의 끝에서, 혹은 가을 끝에서 불현듯 더이상 사용할 수 없는 낡은 부채를 찾아내어 불태웠다. 무수히 우리를 스쳐가는 사물들 중에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내 손에 들어왔다가 어느 날 홀연 잃어버리는 부채가 있는가 하면 이태를 한참 지나 접힘 부분의 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내 곁을 지키는 부채도 있고 부주의한 실수로 댓살이 꺾여버린 채 어느 서랍 속에 박혀 잊혀진 채로도 떠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어느 가을 연례행사처럼 메모지나 사소한 기록들을 태우거나 정리할 때 문득 생각나 다비를 치러준 세 개의 부채는 지금 어느 허공을 깨우고 있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