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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노르말'- 슬픈 사랑에 대한 위로

미송 2011. 2. 26. 08:04

'세 노르말'- 슬픈 사랑에 대한 위로

TV리포트 | 정보화 시민기자 | 입력 2010.02.08 09:09

 

[북데일리] '놀라지 말아요. 당신들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그대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평소에 그대로, 태연하게 생의 안쪽에 앉아 있어요. 그대로...... 자 이제, 나를 보세요. 풀밭의 외기에 맨몸을 맡기고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나를요. 아무것도 피하지 않는 평온한 내 눈을 보세요.' (247쪽)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 전경린이 돌아왔다. 다시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외설적이면서도 당당하게 관객을 쳐다보는 마네의 그림 속 여인같다. 곧고 도발적이다. < 풀밭 위의 식사 > (문학동네. 2010)에서 그녀는 한 여자를 관통하는 사랑의 역사를 보여준다. 기다리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헤어나오고 다시 사랑을 꿈꾸는 과정을.

주인공인 누경에게는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 당한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상처, 해피엔딩이 될 수 없었던 친척 오빠 서강주와의 사랑의 상처. 그런 누경에게 기현이란 남자가 다가온다. 고독하지만 친절한, 평생을 함께하기에 나쁘지 않은 사람. 그러나 누경은 기현에게서 '두 사람을 동시에, 같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묘약'(230쪽)을 발견하지 못한다.

뜻밖에도 그 묘약을 누경은, 기현의 선배 인서에게서 본다. 어디에 뿌리 내릴 지 모를 사랑의 씨앗. 그건 누경의 상처를 껴안아 줄 수 있을까, 혹은 더 헤집어 놓을까? 어찌되든간에 삶은 이어질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책에서 사랑은 유리에 비유된다. 몇천도의 고열에서 스스로를 녹이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유리는 우리가 하는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거기에 도취된다는 점에서. 또한 언제 깨질지 모를 위험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에서.

모든 유리는 깨짐으로써 자신의 명을 다한다. 누경의 사랑이 고통으로 끝나버렸듯이. 그러나 우리가 잊고 사는 유리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깨진 유리는 다시 고열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

서강주의 마지막 선물인 녹색화병이 깨지고 난 후 누경은 파편을 들고 유리공방을 찾는다. 산산조각난 유리들을 새로운 모양의 화병으로 만들어낸다. 그 앞에서 오열을 한 후 현실로 돌아온다. 물론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인서를 만난다. '세 노르말'이란 말과 함께 사랑의 씨앗을 누경에게 휙하니 던져놓는 남자를. 세 노르말. 피하기 어려운 걸 그대로 안은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프랑스 말. 바로 누경의 현재 모습이자, 사랑 앞에 슬픈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말이다. 과거를 인정한 채 미래를 받아들이기.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은 분명 아픈 일이다. 때론 바늘이 가슴을 쑤셔 잠들지 못할 수도 있고, 다리가 후들거려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때를 인정할 때에야 그건 현재라는 맑은 물에 씻겨나간다. 그 과정을 겪은 후 변한, 맨몸의 자신이 낯설지도 모른다. 다들 옷을 차려입은 자리에서 혼자 발가벗은 모습이 부끄러울수도 있다. 그러나 당당하라고, 똑바로 얼굴을 들고 일상에 어울리라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내 안의 목소리가 잠들고, 타인의 목소리가 요동치지 않는 내면의 고요함. 그 속에선 어떤 사랑도 결코 상처가 되지 않을거라고, 한 줄기 바람 부는 풀밭 위에 누워 속삭이는 누경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