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민정<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미송 2011. 3. 19. 10:19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 작은 사건들 32


한 시인의 시집이 인쇄되고 있었다
불교방송에서 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에게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하는 여승도 있다 했다
한 시인의 시집이 채 다 인쇄되기도 전에
시인보다 앞서 새 시집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내가사라는 절입니다
시집 100권 주문합니다
주소 불러드릴게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 553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받는 사람에
야한 스님,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스님과
몇통의 문자메쎄지를 주고받았다
밀양 하면 다들 전도연으로 압니다만,
내가사는 여자가 머물기에 참 좋은 절이지요
한번 놀러오라 그리도 말씀하셨으나
여직 스님 떠올리면 야한이니
아직 갈 때가 아닌 듯해 나는 차일피일이다.




1976년 인천 출생. 1999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
도치 아가씨>가 있음. 그 외, 뛰는 여자 위에 나는 詩, 아내라는 이름의 아, 네
오빠라는 이름의 오바,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남편이란 이름의 남의 편,
등등의 시도 있음.

<시감상>
세상 모든 것이 연(緣)하여 일어나는(起)이치라는 걸, 바닷물의 들락댐을 보면서도 매양(每樣) 생각하는 우리, 저 바다, 같은 물빛이 아니듯 오늘의 파도도 우리도 이미 어제의 그것이 아님을 안다. 무위의 물살도 그러하거늘 유위(有爲)의 법그물을 뚫을 수 없는 인간이랴. 참외밭에서 수박을 만나면 그건 필시 수박 씨앗이 원일일 터, A는 B다 라는 단답의 인과율이나 방정식을 원하는 건 한물 간 양식(manierisme)이다. 최소한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 고집불통처럼 수박이 어떻게 참외밭까지 왔냐고 바락바락 대들거나 담장 밑에 심지도 않은 나팔꽃이 왜 계절도 모르고서 피었냐 따지면 배경설명은 무척 길어진다. 그냥 한가지 결과에 꼭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은 式 정도로만 말해도 괜찮을지, 모든 게 다 제 마음 안에 있다니까.

한 편의 그녀 시를 읽고 호기심이 당겨서 또 대 여섯 편 다른 시를 읽고, 그러고도 이미지와 기사와 여행칼럼을 훑어보니, 입소문 그대로 무서운 여자다(여자가 봐도). 시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리듬감(음악)이나 이미지가 결여된 산문 형식의 자유시지만 (그게 작금의 문학 현실이고 또 내 숙제이기도 하지만), 김민정의 시는 독자의 눈꺼풀이 번쩍 올라가게 하기에 충분하다. 시인이란 꼴난 이름을 얻은 후 비로소 개명동기를 혁명과정으로 바꾼 나는, 김민정의 시 앞에서 꾸준히 박수를 던질 마음자세를 갖춘다. 비록 시를 읽는 동안 읽고 난 후, 스카이콩콩을 타고 내려온 머슴아이처럼, 싸이키조명 아래의 동일한 점프를 본 사람처럼, 현기증과 서글픔을 앓게 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