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미<사랑>외 1편
사랑
연암은 열하를 일러 '사나이가 울 만한 곳'이라 했는데
당신은 바다를 일러 '사랑이 울 만한 곳'이라 한다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난 한번도 세계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그건 늘 당신으로부터 사랑이 왔기 때문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랑이 확장되는 시간
물고기가 키스하는
이 명랑, 이 발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시간을 활용할지 아는 연인처럼
혹은 맨처음 바다로 나아간 최초의 사람처럼
우리는 진짜 인생을 원해
저 바람 좀 봐 애인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저 파랑, 저 망망!
그리고 공연히 무작정의 눈물이 왔다
<시감상>
연암 박지원과 당신을 대비시키며 사랑을 말하고 있다. 시제(詩題)는 분명 사랑인데,
그 사랑의 세계를 좀 더 확장해 보자는 프로포즈인지, 너른 바다로 무심히 애인을 떠나 보낸 눈물 이야기인지, 관념이 섞인 시다. 호연지기를 말하려다, 열하와 망망 바다를 말하려다, 자칫 자괴(自愧)에 빠지는 듯한 화자의 모습이 추상처럼 비치긴 하지만 여성의 필체로선 대범하다.
어떤 삶의 가능성
스무두살 때 나는 머리를 깍겠다고 전라도 장수에 간 적 있다 그곳
엔 아주 아름다운 여승이 있었고 나와 함께 그곳에 머물던 경상도 아
가씨는 훗날 운문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왔다 돌아와 한동안
무참함을 앓았다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내겐 거울
도 지도도 없었고 눈물뿐이었다 나는 나를 꺼내놓고 나를 벗고 싶었
으나 끝네,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고 하
는 중이었는데 나는 감히 요절을 생각했으니 죄업은 무거웠으나 경기
장 밖 미루나무는 무심으로 푸르렀고 그 무심함을 향해 새떼들이 로
켓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업은 무거웠으
나 그런 날이 있었다
<시감상>
문학소녀라 불리던 사춘기 시절에 한번 쯤 머리 깍고 비구니가 되거나 나이팅게일처럼 백의의 천사가 되거나 해맑은 수녀가 되는 꿈을 안 가져 본 여자가 있을까. 물론 나 같은 이는 기독교 광신도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절 근처엔 얼씬도 못하였지만, 가끔 살다가 늘그막에도 출가하고 싶다는 문인을 만나긴 했다. 가출인지 출가인지 나도 뭔가 하긴 한 거 같은데. 매순간 삶은, 축복처럼 가능성을 가지고 잠복해 있다가 눈치 빠른 사람 몸에 달라붙어 환생하기도 하는 것.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 해서 넌 그 꼬락서니로 밖엔 살 수 없어, 하는 꼴통 이론은 부르디외의 교육사회학 이론 앞에선 단칼에 아웃이다. 무심(無心)의 미루나무와 새떼들이 있는 한, 삶은 한 때의 무거운 업(業)으로 인해 쉬 종식될 그런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 시와 무슨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현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문학동네]로 등단. 시집[곰곰],
[이별의 재구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