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
두 신작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 ‘삶이라는 직업’ 펴낸 박정대 시인
……저의 시적 경향이라, 글쎄요, ‘불멸의 좌파 같은 시를 썼다’고, 나중에라도 그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노래했던 그 친구 이름이 닉 케이브였네요
-‘무가당 담배 클럽’ 참 재미있는 이름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클럽인지요, 아니면 시적 상상 속의 이름인지요?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가당 담배 클럽’도 실제로 있습니다, 단순한 동인이 아니라 시인, 가수, 영화감독 등 다방면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전 방위적 모임입니다, 특이한 점은 체 게바라, 세르주 갱스부르처럼 이미 죽은 사람도 클럽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면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 못합니다. (시 ‘닉 케이브, 천사가 노래한다’ 부분, 시집 <삶이라는 직업> 수록)
인터뷰를 마친 다음, 그의 시집에서 이미 잘 정리된 인터뷰를 발견했다. ‘불멸의 좌파 같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 닉 케이브가 천사였듯이 ‘시를 쓰는 자들 또한 전직 천사’였다고 주장하는 시인 박정대씨(46·사진)다.
그는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설정을 빌려와 두 신작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와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천사는 곡마단의 소녀를 사랑해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가 천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은 흑백, 인간이 된 이후의 세상은 천연색이다. 마찬가지로 전자의 시집은 천사의 시각, 후자의 시집은 인간의 시각으로 씌어졌다. 모든 가능성에는 왜 거리가 있는지, 삶이 어떻게 직업이 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된다.
“두 군데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시집 출간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미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있었는데 이것을 두 주제로 나누고, 새 원고를 추가했습니다.”
천사의 시각? 모든 게 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경쾌하고 몽상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각은? 생생하지만 고통스럽다. 그런데 천사는 이미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신의 구원을 바랄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전직 천사였던 진실한 인간들에게 고독은 숙명이다.
시인이 볼 때 고독한 인간에게 구원은 같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진다. 이를테면 ‘천사가 지나간다’(<삶이라는 직업> 수록)란 시에 열거된 이름들, 가스통 바슐라르,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크, 밥 딜런, 백석,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파스칼 키냐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다. 추상의 하느님 대신 천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살 만한 곳이라는 긍정에 이른다.
박씨의 시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며 이국적이고 불온한 동시에 선하다. 심야 카페, 담배 연기, 맥주, 영화 속 한 장면, 블루스 음악, 유럽의 작은 도시로 독자를 데려간다. 도시와 대중문화의 매력으로 제도와 의무에 찌든 현대인을 무장해제시켜 낭만과 초월의 영역으로 이끈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센·티·멘·털. “센티멘털과 보편, 센티멘털과 형이상학, 센티멘털과 연대와 운동과 전복을 연결시키는 것이 박정대의 본질”이라고 그의 동료인 성기완 시인은 해설에서 썼다.
이런 시를 쓰는 그는 누구일까. 올해 20년차인 고등학교 국어교사, 퇴근 이후에는 철저히 시인이다. 일찍 잠들었다가 밤 11시쯤 다시 일어나서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즐기고 시를 쓴다. 첫 시집 <단편들>(1997)을 시작으로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키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등 이미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이며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 이런 비밀결사는 그에게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가 앞으로 쓰고 싶은 시는 어떤 것일까. 시집 <삶이라는 직업>의 마지막에 실린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처럼 아주 짧고 쉬운 시다.
한윤정·사진 서성일 기자
박정대 시집 -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 2011)
1부
봉쇄 수도원
청춘 계급
마 리베르테
마 솔리튀드
나의 플럭서스
약속해줘, 구름아
얼굴에 콧수염을 붙인 천사
파미르 고원
해적 방송
러시아 혁명 호텔
계속 혁명 게르
나의 기타 게랑초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포카라 공항에서 천사를 만나다
안녕, 안나푸르나
50 SATANG BAR에서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짐 자무시 67 행성
슬라브식 연애
러시아 혁명사를 싣고 가는 밤
미셸 우엘르베끄
2부
혁명적 인간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
닉 케이브, 천사가 노래한다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
타락천사이었거나 전직천사였거나
아마도 당신이 음악이었거나
남쪽 항구
착색판화
타인의 취향
무용
코케인 저녁
아직도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나의
지구에서의 차와 담배와 고독사용법
통영
풍경 한계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짐 자무시 67 행성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나타샤 댄스
진부라는 곳
천사가 지나간다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마오이스트 거리의 쓸쓸한 선언문
3부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라이터 관리술
딩뱃 고원
EL CHE VIVE!
혁명을 꿈꾸며 사랑을 사랑하는 삶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구름 위를 지나 당도한 또 다른 행성에서의 삶,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안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나의 플럭서스」 부분
2011년 5월, 박정대의 시집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된다. 그중 하나가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 2011)이다. 삶이 직업이라는 말에 독자들은 의아함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직업’은 선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 않은가. 이 질문을 푸는 열쇠는 그의 시집 두 권이 한꺼번에 출간되는 이유에 있다. 천사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 2011)에 담겼다면, 『삶이라는 직업』은 그 후 천사가 세상으로 내려와 직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겪는 일들과 그에 따른 감흥을 고스란히 녹여낸 시집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그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바닷가 조개껍질을 주워 화폐로 사용할 테다
[……]
그러니 누구든 지상의 양식을 독점하려 하지 말라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누구에게도 지구의 식량과 음악과 영혼을 독점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국경이 국경 안의 인민만을 배불린다면 그 국경은 타도되어야 하리라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부분
이 적강 천사는 잠시 지상에 소풍 나온 구경꾼이 아니다. 그에게 “삶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는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낭만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끊임없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음식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하고 사랑을 하며 살아갈 권리를 찾아 혁명을 외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좀더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바라며. 하지만 이 시집에서의 혁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체제의 전복, 이데올로기적 승리로서의 의미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에게 혁명은 원시림에서 마시는 뜨거운 수프, 사막에서 쓰는 한 줄의 시, 사랑 후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 그 자체이다. 이 시집의 해설자 강정 시인이 말하듯 그에게는 그만의 체 게바라가 있다.
당신을 향한 말레콘 해적 방송
카리브 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 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이야
-「해적 방송」 부분
이제부터 당신만을 위한 말레콘 해적 방송이 시작된다. 이 해적 방송으로 당신은 카리브 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들을 수도 있고, 밤새 노란색 별들이 깜박이는 걸 볼 수도 있다. 당신이 텔레폰 성냥의 불꽃으로 전화를 걸어온다면 당신이 꿈꾸는 혁명의 레시피를 소개할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을 위한 여권도 만들어줄 수 있다. 박정대는 이번 시집에서 시를 쓰는 자신과 시를 읽는 ‘당신’을 잇고, 끊임없이 혁명과 사랑의 메시지를 타전한다.
영혼의 동지들
가스통 바슐라르, 갓산 카나파니, 닉 케이브, 라시드 누그마노프,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끄, 밥 딜런, 밥 말리, 백성,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또르 쪼이, 피에르 르베르디, 아네스 자우이, 악탄 압디칼리코프,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조르주 페렉, 지아 장 커,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톰 웨이츠, 트리스탕 차라,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아 트뤼포
-「천사가 지나간다」 전문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오직 시인 하나만인 것은 아니다. 위 시에서 언급된 이들도 바로 전직 천사로서 삶이라는 직업을 수행한 영혼의 동지들이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던 철학자, 문학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이다. 이 “혁명적 인간”들은 시집 중간 중간에 등장하며 그들의 행위나 언급이 콜라주처럼 이어 붙어 박정대가 의도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몇 개의 비밀결사 조직, 가령 시로 암호를 타전하는 요원들,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동지들”이 있으므로 그는 고독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L CHE VIVE!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하자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 만세란다. 자신의 고독과 더불어 하얀 침묵의 눈 속을 오래 걷고 싶어서 히말라야로 향하는 그는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속에서도 “체 게바라 만세/체 게바라 만세”라고 낮게 읊조린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적강 천사로서 삶과 세상에 부딪히고 긁히고 피 흘리며 살아가면서도 혁명을 꿈꾸는 의지가 전해져 읽는 이의 마음에도 한 점 불꽃이 일도록 한다. 이렇게 당신을 위한 해적 방송을 들으며 암호로 타전되는 영혼의 시를 해독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당신은 “얼굴에 콧수염을 붙인 천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시집 속으로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 전문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세상을 가져 온다
바나나가 그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열어 음악을 들으면 눈밭 위에 앉아 짹짹거리는 작은 새들의 소리처럼 그리운 소음
소음이 그리운 날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빠져나와 하루 종일 닉 케이브를 듣는다
닉 케이브라는 소음의 천사를 나는 예전에 알았다
그가 전직 천사였다는 것을 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 때문에 타락 천사가 된 그를 나는 인간적으로 듣는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소음 속에서 침묵을 추구한다
한없이 떠들어야지만 더욱더 견고한 고독이 완성되므로 여전히 사랑에 빠져 노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다
왜 그가 타락 천사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준다
사실 말은 필요 없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의 비극을 감싸 안으므로 우리는 장엄하게 아름다운 비극이다
여기까지다, 시인이 할 일은 세상 모든 원소들을 백색소음에 데려다 주는 일
그 다음은 이 세계의 일, 모든 소리의 가청 주파수대를 의미하는 백색소음 속에서 시인은 침묵과 고독이라는 물질로 새로운 시의 원소를 만드는 연금술사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침묵의 음악이고 그 이후는 침묵을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순간 누군가 안쓰럽게
이 시를 읽고 읽을 것이다
타락 천사이었거나
전직 천사였거나
아마도
당신이 음악이었거나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 전문
■ 시집 소개 글
세계의 흐름과는 또 다른 시간 패턴 위에서 박정대는 세계의 통상적 명명법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다른 이름’들을 적시한다.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을 때, 그것은 때로 음악이 되기도 하고, 빳빳하게 격절돼 있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틈을 벌려 누군가의 삶과 죽음과 사랑을 상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 뽀얀 먼지들이 접착력 강한 문자로 몸에 각인된다. 전 세계가 고독의 무늬로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다가 사멸한다. 이것은 시의 독성(毒性)이기도, 존재의 오연한 독성(獨醒)이기도 하다.
■ 뒤표지 글
삶이라는 직업은 센티멘털하다
나는 애정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방에 편재한 사랑을 볼 때마다 갸륵한 인류애에 사로잡힌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함께 잠들 수는 있지만 아침이면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깨어나야 한다’는 애정 공산주의의 수칙에 공감하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즉 교착적 음향의 사랑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애정 라이프니츠주의자에 가깝다
他者에 대한 영원한 동경 때문에 나는 삶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고독과 분별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
오지의 행성에서 오지 않는 신비를 기다리는 늑대사냥꾼처럼 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한 마리 시를 기다리며 밤과 새벽의 영토를 기꺼이 고독과 침묵에게 내어줄 것이다
밤새 함박눈이 쏟아지려나보다
영혼의 동지들이여 단결하자(어떻게? 아무튼!)
창가에 올려놓은 맨발의 반가사유상, 체 게바라 라이터, 담배 한 대, 고독은 실제적인 것이다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아무르 기타』『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모든 가능성의 거리』가 있으며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