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요, 도취이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요,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북구의 신화와 전설을 보면 유난히 음습하고,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피요르드와 빙하들로 둘러싸여 있고 오로라가 밤도 낮도 아닌 북구의 하늘에 빛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곳에서 태어난 뭉크는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질병을 표현한 화가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을 일삼았다. 그는 시대의 불안과 공포, 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을 추구했던 세기말의 천재 화가였던 것이다. 뭉크의 집안은 대대로 성직자, 문인, 관료, 장교가 있었고 이들 중에는 몇 개의 직업을 겸한 사람도 있었다.
‘뭉크'는 승려를 뜻하는 말로, 그의 할아버지는 고위의 성직자였고 아버지 페테르 크리스티안 뭉크(Peter Christian Munch, 1817~1889)는 노르웨이의 군의관이었으며 나중에는 관료 봉급에 보태기 위해 당시 도시였던 크리스티아니아(오늘날의 오슬로)근교 빈민가의 의사였다. 그의 집안은 노동자가 많이 살던 그 일대에서는 거의 유일한 관료집안이었다.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그의 아버지는 1861년 44세의 나이로 23세였던 로이라 카트리네 비욀스타와 결혼한다. 여기에서 1862년 딸 소피에가 태어났고 1863년 12월 12일에는 에드바르트 뭉크가 태어났다.
나의 모친의 가계는 농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뿌리까지 어지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의 선조들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시인었지만 이들도 이미 타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죽음의 씨앗을 몸 안에 갖고 있었다. 6년 후 어지럼병이 다섯 어린 아이들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갔다. 그렇게 병과 정신착란과 죽음이 마치 검은 천사처럼 내 요람을 지키고 있었고 일생 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울하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부담에 겨워 핼쓱해졌고 주기적으로 종교적인 발작을 보였는데, 그것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신을 불러대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일찍 이 지상의 삶의 비참함과 위험요소들을 알아버렸고 또 죽음 이후에 오는 삶과 죄진 인간을 기다리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종교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우리와 장난치고 놀며 우리에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벌을 줄 때 그 영혼의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 배나 더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의 신경증적인 광포함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에드바르트 뭉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