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1
죽음을 향해 바삐바삐 진행되는 삶의 행진 속에서 하나의 웃음, 하나의 즐거움은 초월적 득도의 자세, 곧 풍류스러움이다. 우리의 멋 또한 버선코의 가벼운 오름세, 높은 파도의 가벼운 내림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2
살아 있음은 늘 살아 있을 것 같은, 늘 살아 있고 싶은 소망을 키운다.
이것은 삶이 지향하는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
3
자유시, 자유시.....
그 자유시가 너를 구속할 때는
차라리 그 자유로부터도 떠나라.
4
자화상 / 안또니오 마차도
이게 제 얼굴, 이게 제 마음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권태스러운 눈 몇낟, 목마른 입 하나
다른 거야 별거 아니지요 산다는 거 그저 그런 거
뻔히 아는 그런 거
놈팡이 짓이나 바람기 같은 별 중요할 것 없는,
조금은 미친 기, 조금은 시가 있는,
거기, 한방울의 우수의 포도주
주색잡기요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안 좋아하든지
노름이요? 한번도 안했습니다
마시는 건 하지요, 어찌 내 고향 세비야를 배반하겠습니까,
작설차 다섯 여섯 잔 정도
여자요? 돈 후안이 아닌 바에야 그건 안되지요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몇가지 것들만을
민첩성 재치 멋 그리고 기발함
그런 것을 의지나 힘 위대성보다 좋아하지요
나의 풍류도 어렵게 어렵게 찾은 겁니다 차라리
고대 희랍식 순수한 뜻으로의 멋이나 투우사 같음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반은 집시 반은 빠리지앵 사람들 말이지요
몽마르뜨 마까레나 성모나 모두 숭앙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렇다 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첫 소망은 멋진 깃대 꽂은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미 늦었죠 세상 산다는 게 바쁘군요 하지만 제 웃음은
즐겁습니다 늘 바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5
인간이 신의 꿈이라면 인간은 신의 명령과 신의 꿈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
6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 또한 우리이기 위해서(우리가 단순한 그림자나 꿈이 아닌, 실체 혹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신이 꾸는 꿈의 산물이라면, 신 또한 인간이 꾸는 꿈의 산물이다.
7
"비밀은 가장 따스한 햇살에도 꽃피지 않는다"
꽃과 열매까지를 거부하는 은밀한 이름은 노자의 '무명(無名)'을 연상시킨다.
8
(전략)
그러나 그런 마술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망각이 살지 않는 곳에
행복이 오지 않듯, 하나의 죽은 목소리가
제풀에 꺼져갈 뿐
어느 바다도 하늘도 꽃도 여인도 없다
아무도 상처투성이의 장미를 계속 달고 다니는 하늘을, 여인을 보지 못했다
부질없는 입들 사이에 길을 잃은 사막
얼마나 견고한 침묵이 장미를 덮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어디에 진정한 생명이 있어 장미의 혼을 빼고
그녀를 시간으로부터
떨쳐놓을 수 있을지
어디에 장미의 불가능한 살결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그 서서한 수수께끼의 기호가 가능해질지, 변함없는 본질의 불꽃이.
- 리까르도 몰리나리 <피에게 바치는 송가>
그렇다 영원과 절대, 사랑에 대한 꿈은 곧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집착이다.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에 시간의 횡포는 우리 눈앞에서 모든 꽃을 사위게 한다. 결국 '변함 없는 본질의 불꽃'으로 남을 수 있는 장미란 불가능하게 된다.
너는 대평원 속 젖은 계절의 달아나는 태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온다
세월의 차가운 이파리들 그 넓고 굳은 숲을 넘어
색깔도 희미해진 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간직한다 말없는 말 하나로
풀잎 사이 소곤대는 발걸음이 권태를 덮는다 멀고 꺼져가는 향기가
머물러 피운 불길 너는 곧바고 몸을 추스리고
뼈 사이 부서진 주름투성이의 옷을 집는다
너를 스치고 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영혼과 깊
이를 요구하는가
그렇다 대기처럼 불길과 안개가 자욱한 너의 입속으로 내가 들어
가리니
너의 발걸음은 대양의 해일과 느린 하늘 그 마지막 숨결에 젖은 광휘
빨간 바다 기러기와 밤이 날다 깃들이는 남쪽의 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하늘
꽃핀 어둠 밑으로 돌아와 고뇌의 목소리로 부른다
그리움에 차서 산산히 부서진 채로.
망각이 비둘기처럼 커갈 때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람은
끝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울부짖고 하나의 경악처럼
굴뚝의 검은 목구멍으로 파고든다 안에 불이 탄다 서서히 그리고
문득 기습당한 고독감이 부서진 기둥 사이에서 서성인다
영혼은 읽어버린 따스함을 찾는다 닳고 닳은 옛 책들 속이나 지
상의
횡포 속으로 도망쳐온 발걸음 속에서
그토록 너를 사랑했기에, 오늘 과거도 아늑하고 세월의 차가움도
빗줄기도 따스하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말없이 키만 우뚝 선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이들 불길에 데운다
혹시 이 밤 이 불을 지키며 내가 죽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오늘밤
나의 선조들의 마술스러운 미궁의 삶과 그 영원성을 반추하며 나
자신도 나의 주위에 텅빈 채 머물러 있는 실존의 하나일 것을 생
각하며
그리고 나는 나의 거칠고 스산해진 무거운 머리칼과 흩어져서 서성
대는 구름떼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허무를 허무 속에 더욱 가두고
사랑도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기
그런 마음으로 너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이윽고 동이 터오른다.
- 기까르도 몰리나리 <겨울밤에 바치는 송가>
기억도 아득한 네가 생각난다. 깨어진 기둥처럼 이미 잊혀진 사연들이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나의 사랑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키만 큰 허깨비의 삶.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춥고, 추억의 벽난로에 몸을 데운다. 책을 읽는다. 거기에도 나와 같은 애절한 사랑이 있음을 본다. 전신전화국 앞에서의 이별을 아파한다. 그와 똑같은 아픔과 절규가 나의 선조들의 아픔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나만의 고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나이는 인류의 나이이다. 구름의 나이이다. 이미 머리칼도 스산하고 구름 또한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머리칼과 우주의 머리칼 혹은 구름을 정성스레 매만진다. 슬픔과 그리움을 졸업해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음을 안다. '욕심 버리고 사랑하기'의 마음일 때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세상은 나처럼 고뇌하고 또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있구나!
-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민용태 ; 창작과 비평>
* 타이핑 ; 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