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창비 여름호 특집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미송 2011. 7. 22. 00:24

'천사 - 되기'에서 '무식한 시인 - 되기'로 / 심보선 (시인)

평론가, 시인, 문맹자의 문학적 정치들

 

 

1

말하기의 독특성, "이는 평등을 측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 측정은 가까움과 멂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여기에서 실험되는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늘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식으로 행동하라. 이는 곧 끊임없이 측정하고 평가하고 매번 이 가까움과 멂--이것들은 평등한 공동체의 틈새들을 정의한다 --- 을 재창조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다." 

 

2

'늘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식으로 행동하라'는 실천적 정언명령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는 주지주의적 정언명형뿐 아니라 '지게꾼의 이해관계와 당신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라'는 현실주의적 정언명령, 그리고  '지게꾼의 심장과 당신의 심장을 일치시켜라'는 도덕적 정언명령과도 구별된다.

 

3

진은영은 "문학과는 다른('딴') 자리들을 문학의 자리로 만들고 문학을 다른 자리로 만드는 왕복운동"을 제안하다.

 

4

세계의 비참과 문학 사이의 거리의 견지나 거리의 말소가 아닌 거리의 조절,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면서 독특한 말 --신체의 장소, 평등한 공동체의 틈새를 모색하는 왕복운동이야말로 문학의 정치

와 민주주의적 글쓰기에 내재하는 고유한 '진동'(진은영)이라고 할 수 있다.

 

5

문학은 세계의 비참에 대해 독특하게 말하는 타자를 창안함으로써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새로운 말 -- 신체를 갖게 된다. 말할 수 있는 신체와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분리--시인과 독자의 분리, 문학과 비문학의 분리, 사유와 노동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를 고수하려는 치안적 질서는 이 새로운 말 --신체, 수다스럽게 부유하는 유령이라는 존재 때문에 골치를 썩게 된다.  이 유령과 접촉하고 유령이 되려는 모든 이들은 하나하나 기원이 될 수 있는데, 이때 기원은 심오한 고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의 비참에 대해 말하려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이 작동하는 출발점이다.

 

지게꾼-되기의 시는 사회학적 결정론에 반하는 시이다. 지게꾼-되기의 시는 쓸 수 없는 지게꾼이 사회적 조건의 결려에도 불구하고 쓰는 시, 사회적 조건의 결여를 문제삼으면서 쓰는 시, 문단 내 유파의 한계 바깥에서 쓰는 시, 양심이 아니라 말하려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을 작동시키는 시, 딴사람-되기를 감행하며 쓰는 시이다.

 

7

시인은 해방된 노동자이 자리, 낮에는 빵을 위해 혹독하게 일해야 하고 밤에는 사유와 시의 황금에 전념하면서 두 삶을 살아야 하는 침입자의 자리를 훔친다. 벌써 "엉망진창이 된"하루 일과와 시작(詩作)을 위해 수면시간을 줄여햐 하는 구속감을 진술하는 청년 말라르메의 편지는, 노동의 낮과 사유의 밤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태에 빠져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썼던 편지들을 모사하는 것이다.

 

8

말라르메와 프롤레타리아 모두 침입자인 이유는 휴식을 취해야 할 "밤에 사유와 시의 황금에 전념하면서"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을 와해시키고",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실존의 조건들과 사회적 질서의 토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 텍스트 자체뿐 아니라 시쓰기를 위한 시간의 할애와 장소의 확보 또한 침입의 행위에 포함된다. 말라르메나 프롤레타리아, 등단한 시인이나 등단하지 않은 시인 그 모두에게 창작에 필요한 시간과 장소는 여분의 것이 아니라 초과의 것이다.

 

9

그들은 그 시간과 장소를 사유와 열정으로 채워넣는다. 지게꾼의 돋특한 말-신체란 시간, 장소, 사유, 열정, 쓰기, 살기, 말하기, 행동하기 이 모든 것들의 합이며, 그 합에 또 가시 "하나 더의 무한한 가능성"을 더하기를 원함이며, 그럼으로써 "배제적인 합의성의 정식"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 더, 더, 더----를 원한다. 우리의 몸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몸'이란, '하나-더'를 무한히 욕망하고 추구하는 몸, 즉 치안적 질서가 할당한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초과하려는 말-신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10

시를 천사-되기의 꿈이라고 보는 관정메 따르면 이들은 세계의 비참을 문학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다. 그 관점에 따르면 이들은 시 바깥에 존재해야 하는, 그래서 시라는 천상으로부터 내리쬐는 빛에 의해 자신의 비참한 진실을, 그것도 추문의 형태로만 내보일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이들의 시를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시를 천사-되기의 꿈이라고 보는 관점과 반대로, 문학의 정치를 수행하는 의지와 역량이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귀속되고 발휘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11

평론가들은 이렇게 천상에서 땅으로 단계적으로 하강하는 천사의 숨은 운동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텍스트의 진리값을 계산하여 내놓으면 독자들은 그에 반응하여 광장으로 걸음을 옮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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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 사이의 문턱들을 가정하는 이 단계적 발전의 알레고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동반하다. 누가 그 문턱 한에 갇혀 있고 누가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론가들은 또다시 추측하고, 유도하고, 추론할 뿐이다. 분리된 문턱의 한계 안에 감각의 능력을 분배하고,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자와 넘을 수 없는 자를 분리하고,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그렇게 문학적 형식과 주체를 통제하고 조직화하면서 말이다. 

 

13

지게꾼-되기의 시, 무식한 시인-되기의 시에 내재하는 익명의 힘들, 말하고자 하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으로 신체를 변용하는 힘들은 내재적 평면 위에서 작동한다. 이 힘들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귀속되고 발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작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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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효과인 평등 공동체의 구성은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언젠가'의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잠재성으로, '무에서 유로의' 창조력이 아니라 '느리거나 빠르게, 흩어지거나 모이는 '구성력으로 드러난다. 

 

15

들뢰즈는 "전자와 후자이 평면(신학적 평면과 내재적 평면)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글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학제도 안에 거주해온 우리는 어느 평면 위에서 살고 사유하고 쓰고 있는가? 서글프게도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적 평면 위에서 천상의 천사들을 올려다보았고 그들이 언제가 거대한 진실의 날개로 지상의 비참을 덮어주리라는 난망한 꿈을 꿔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작 다른 평면 위에서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다른 존재들을 외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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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익명의 힘들이 '지게꾼-되기', '무식한 시인-되기', 그밖의 다양한 '딴사람-되기'를 감행해온 길고 오랜 모험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왔다. 문학의 정치가 이미 사회체에 내재된 초과로 존재하면서 민주주의적 글쓰기를 실행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 평면에서 저 평면으로 말과 사유와 삶을 자리옮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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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라' 이것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실천적 정언명령이다. 우리가 '딴자리' 로 옮겨갈 때, 지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때, 평등에의 옹호는 '등단을 했건 안했건,  시를 쓰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다'라는 식의 태도, 흔히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안이한 태도와 단호하게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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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따비오빠스는 보르헤스가 우리 모두는 동시에 활 쏘는 이, 화살, 과녘임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팽팽하고, 날카롭고, 정확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 '온몸'으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현재의 노예상태의 비참으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창비 여름호 특집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천사 - 되기'에서 '무식한 시인 - 되기'로> 중에서 

 

*타이핑, 채란  

 

 

Memo~ 심보선 시인의 이력(사회학쪽으로 전공한 듯)과 최근 시'인중을 긁으며'의 시상내력과 평론가들의 조명을 떠올리며 타이핑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따라붙는 이름이 바로 교육사회학자인 프랑스의 '부르디외'이다. 독서지도사 과정 중에 정교수에게 소개받은 부르디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사상이며, 세뇌되어 온 기존지식에 대한 전복과 재정립의 방법이었는데, 오늘 시인이 일관되게 끌고가는 주제 역시 그러한 민주주의적 글쓰기 사상이 아닌가 싶다. 제목의 의미를 확실히 인지하고 넘어간다. 신학적 평면과 내재적 평면의 공간, 문학제도권안에 있는 신학적 평면, 즉 천사-되기의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가 아니면 무식한 시인-되기의 지게꾼으로서 시를 쓰는가 하는 문제. 분명한 건, 시란 제도권이나 권위 앞에 굴종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체계로 자기의 세계와, 자기의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하는, 민주주의적 글쓰기를 웅변 아니 채찍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를 이제야 좀 알겠다. 타이핑을 하면서, 심보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사회학에 기초한 혁명적 발언이 무엇에 대한 절규인지 느낀다.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이 순간의 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