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 의한 한국사회 조명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 의한 한국사회 조명
강 재 일(교양학부 객원교수)
1. 서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프랑스의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사상(思想)이 지구촌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지구의 글로벌화가 21세기의 화두로 다가옴에 따라, 이 거대한 물결이 ‘지구촌’이라 규명 지어진 어느 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도록 족쇄를 채워 버렸기 때문에 ‘동감(同感)’ 아닌 ‘공감(共感)’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국내외에서 부르디외에 관한 해설과 비판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개념이나 문제 틀을 이용한 연구가 전반적인 학문분야에서 고루 축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고(稿)에서는 이런 부르디외의 핵심적 사상을 짚어보고 그것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현 실태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물론 한계는 필요 하겠기에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황우석 교수의 치료용 인간배아복제 파문’을 중심으로 그것이 어떠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는지와 권력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연계성까지를 고찰하기로 하겠다.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인간현실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이 21세기의 인간상황에도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바,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진정한 인간해명이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으로 제기되고 있다. 하고 많은 사상 체계에서도 인간의 자기 확신이야말로 세계질서를 규정해온 신적 원리를 대신하며 그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의) 지표라 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성취해 가는 인간존재의 총체성을 이러한 빈약한 이성으로 제한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축된 이성이 인간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한다면 이 또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성적 개념의 빈곤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몰락을 자초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부과한 의무조차도 마치 운명의 책임인양 하여 ‘떠안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진정한 인간조차 자기책임의 무한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제도나 조직화된 체제 속에서 익명적 존재로 죽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가급적 참고문헌의 인용을 줄이기로 했다. 이유는 이율배반적인 이론적 접근보다는 사실로 판명된 사건들을 분석함으로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다. 특히 부르디외가 강조한 “경험적 연구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이론 없는 경험적 연구는 맹목적이다” 란 말에 근거하여 ‘이론’이거나, ‘경험적 연구’거나 우리의 일반적 시각에서의 검증에 노력 하겠다. 사건 사고에 따르는 실적위주의 보도가 숱한 가정(假定)들을 생산 시키고 이것이 또 다른 사회적 불화의 원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아 왔기에 정치적 선택까지도 포함시켜 사회적 몸살을 진단하고자 한다.
비록 그 진단이 오진이라 하더라도 진찰대에 오른 ‘물상(物像)에 대한 섬세한 보살핌만은 인정받고자 할 따름이다. 인간이 거주하는 열린 영역이야말로 무질서한 개인들의 군집(群集)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선(善)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고, 그 질서를 위해 자신의 덕(德)을 실행하는 인간생활의 공간이 아닌가.
2.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 나타난 주요사상
가. 장(場, champ : field)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정치, 종교, 학문, 예술 등 다원적으로 구조화 된 공간을 공시적(共時的)으로 파악하고 그 위치들의 속성을 사회공간 속에서의 위치에 종속시키며 그 위치의 점유자의 속성과는 상대적으로 독립시켜 분석한 이론이다. 이러한 장의 구조는 이전의 상황에서 축적된 자본(資本)이 특수한 자본의 분배를 둘러싼 투쟁과정에서 그 변동을 노리는 전략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언제나 게임의 논리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특수한 권위의 독점을 목표로 한 두 진영이 나뉘어 지는데, 이 한쪽은 자신의 그것을 지키려(正統의 방어) 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전복(異端)하려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사회 영역들 사이의 행동들을 이어주는 관계망에서 서로의 영역에 영향을 주는 요인끼리는 똑같은 비중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부르디외의 이론체계 개념은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기대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베버가 우리에게 종교연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학문적 교훈이 여타의 사회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사회의 여타 영역들은 종교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베버의 종교사회학은 종교가 다른 사회적 가치영역, 이를테면 정치조직, 경제조직, 군사조직, 법체계, 사회 계층, 교육계, 종교계, 윤리, 과학, 음악, 예술, 성(性)과의 상호 관계를 연구함으로서 생활 영역의 내적 의미의 반목(反目)을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합리화 과정의 다양한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방법론적 해석은 사회적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경제나 종교 또는 정치적 차원의 중요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 요인들 중 어느 하나를 일반적이며 핵심적인 것으로 강조하기보다 각각의 요인들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를 더욱 중요시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주어진 현상은 다양한 현상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함께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새로운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예술의 영역과 지식생산의 영역을 거론하는데, 문화적 대상물로서의 예술이나 지식은 사회질서를 재생산해 내는 일종의 ‘지배 매개체’며 종교처럼 정신구조와 사회구조를 매개하는 핵심적 상징체계로 해석했다. 창조적 지식이나 예술작품들은 장 안에 있는 행위자들의 위치와 장을 지배하는 구조적 규칙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것이다.
서구예술의 대 이론(major theory)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이론은 “예술미란 자연미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관념을 전제한다. 고대의 조각가 제욱시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헬레나 상을 만들 때 다섯 처녀의 몸에서 아름다운 부분만 따다가 종합한 것을 보면 자연의 모방도 개별적 자연을 그대로 모사하는 순수자연주의와는 또 별개란 생각이다. 아무튼 예술이란 감각적 자연미에서 정신적 이상미로 승화(昇華)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연은 정신의 동일자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계량화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자연의 질적 측면에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연은 과학적 이성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숭고하게 된 원인도 인간들이 만들어 낸 윤리적 측면이라기보다 어쩌면 이러한 자연의 속성에 힘입어 그 안에 안주하려하는 종교적 제도의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2004년 세계 최고의 과학 전문학술지 [사이언스, Science]에 게재 된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체세포 핵이식 기술을 이용한 인간배아 복제 줄기세포 주 확립’ 논문은 당연히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우석교수와 그 연구진들이 일궈낸 인간 역사의 새 전기를 마련할만한 개과(改過)의 전조.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와 권력구조가 출산한 또 하나의 기형아였다. 적어도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세계의 빈축을 사기에는 충분하니까 말이다.
나. 실천(實踐, pratique : practice)
부르디외가 말하는 실천이란 개념은 ‘관습적 행동’이라 이해 할 수 있다.
이것에는 정치적 입장에서의 의식적인 행위(몸놀림이나 말투 따위)가 무의식적으로 일상생활에 노출되어지는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때문에 부르디외는 ‘사회적 행위주체 acteur scocial'라는 말보다 ’사회적 행위자 agent scocial'란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것이다. 실천은 각 실천 원리의 이면에 자리한 일련의 효과를 차례차례 분석함으로서 설명 할 수 있다. 실천성은 상이한 논리에 따라 기능하므로 상이한 실현형식 속에서 수행된 실천의 다양성과 복합성 속에 은폐된 통일성을 가리게 된다. 즉 구별 적이고 변별적인 모든 생활양식들이 묘사하는 상징공간의 상호관계 안에서,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규정된다. 이를 위해 육화(肉化)된 형태로서 동일조건하에 위치한 동질적인 성향체계를 생성해 내며 계급의 아비투스로 돌아가야 한다.
국경의 의미를 무너뜨린 21세기의 도래. 오늘날의 의미는 인간들이 인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지나쳐 온 과거에 대하여 역사적, 사회적으로 전승되어온 이해하기 힘든 이론들로 대충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제부터라도 감춰진 문제들 앞에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로 다가가 무릎을 맞대야 할 때라 생각한다.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이야 말로 우리 인간이 성별 적 차이를 가졌다는 까닭 하나로 문화적 데카당스에 빠지는 것과, 나아가서 그 막다른 골목에서 일지라도 각자의 실재를 정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회란 인간들이 홀로 객체화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이라는 일정한 가치체계와 연관하여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질서란 것이 생겨났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급이란 것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급이란 사회직업범주처럼 미리 구성된 변수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구조화 되는 자신들의 분류원리인 관여 적 속성에 덧붙여 몰래 도입되는 이차적 특성이다. 이것은 직업이나 소득, 교육수준과 성비(性比), 지리적 여건 같은 보조적 특성들에 의해 정의 되지만, 암묵적 요청이란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전혀 표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때로는 실제적인 선택원리나 배제원리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번 배아줄기세포관련연구의 핵심 멤버인 황우석, 문신용 두 교수가 국내 여타 연구자들의 발을 묶어 놓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후 정부 기관으로부터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받는 등은 특정 출신계급의 특별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사회계급은 단 하나의 특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특성들의 총합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기본속성을 중심으로 짜여진 일련의 속성들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관여 적 속성들 간의 관계구조에 의하여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걸러(평가 해) 가는 과정중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한 사람이 그 모든 책임을 모조리 다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 만약에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었더라면 미리미리 걸러야 할 문제를 걸렀기 때문에 한꺼번에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란 황우석 교수 배아줄기세포 복제관련 심야토론자의 목소리가 크게 부각된다. 무한대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실천들을 동시에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직접적 결정이라는 단순한 차원의 구조밖에 파악할 수 없는 단선적 사고와는 단절하고, 각각의 요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상호 연관된 관계망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일 자체의 성질과 조직의 변화가 사회공간내의 상대적 위치변화를 초래 했을 때 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치하락이 드러난다. 아무래도 개인들은 사회생활을 제 멋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은 공간을 구조화하고 힘(power)들에 종속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 특수한 관성, 즉 각자의 육화(肉化)된 속성에 따라 미세하지만 저항도 생겨난다. 이러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저항들이 결집될 때 사회는 커다란 몸살을 앓게 된다.
헤겔은 경찰행정을 통하여 사회의 외적 질서를 마련하고 조합을 통해서 내적 질서를 정립함으로서 복지국가를 마련하려 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시민사회 내부의 문제를 전체적인 물질적 교섭으로 풀려고 했다. 그는 욕구 투쟁의 장 내에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으며 도덕적 이상이나 국민의 윤리적 정서가 이 모순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사회란 자유의 토대인 동시에 구속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자기의 직위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위들을 위해 자신이 만들어졌다고 느낌으로서 자신의 객관적 운명인양 받아들인다. 이것이 행위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희망을 객관적 기회에 맞추어 조정하도록 하며 존재조건과 타협하여 현재 상태를 수긍하게 하고 현재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도록 이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 아비투스(habitus)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HEXIS'개념에서 발전된 것으로 ’교육 같은 것에 의해 영향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사회구조(장)와 개인의 행위(실천)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을 극복하는 매개적 매커니즘으로 개념화 시켰다. 우리말로는 ’실천 감각‘으로 풀이 할 수 있으나 ’습관‘이나 ’습성‘과는 좀 다르다. 습관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며 자동적이고 재 생산적인데 반해 아비투스는 고도로 ’생성적generateur‘이어서 스스로 변동을 겪으면서 조건화의 객관적 논리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아비투스는 역사에 의해 생산되는 창안 invention의 원칙이면서 상대적으로는 역사로부터 벗어난다.
칸트는 근대철학을 ‘덕’이라는 개념 대신 ‘이성’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세움으로서 인간행위의 관습적 측면을 배제시켰다. 근세기에 들어 이렇게 이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인간행위에도 일정한 규칙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사회가 인간이 ‘좋은 삶’을 영위하는데 관심을 가졌다면, 근대사회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게 된 배경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르디외는 인간행위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유래하는 기억이나 사회적 관습체계, 그리고 이성적 요인으로 축소 될 수 없는 감정 같은 요인까지도 모두 포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시 ‘시간’과 ‘육체’와 ‘표상’이라는 세 가지 구성단위로 나뉘어 진다. 부르디외의 시간 개념은 알제리 지방에서 실시한 인류학적 조사결과와 관련 된 것들이다. 즉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비판하면서 부족 간에 행해지는 원시적인 교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부족간의 교환행위는 선물의 ‘주고- 받기’ 행위이며 여기에는 일정한 시간의 지연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과학의 약점과 상통하는 것인데, 미래와 과거의 시간적 흐름이 독특하게 맞물려 있는 이것이야말로 아비투스 개념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다.
그리고 육체의 문제는 앞의 [실천]에서 잠시 언급을 한바 있다. 이 육체의 문제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의 영향을 받게 되는 전달 매체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육체’다. 즉 아비투스란 사회적으로 범주화 된 가치가 육체에 각인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한 [구별 짓기]를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품위 유지를 우선하는 지배분파 중에서도 경제자본이 많은 경우와 반대로 경제적으로는 빈약하나 문화자본이 풍부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때 돈 많은 사람들과 학벌이나 가문을 중시하는 사람들 간에는 귀족주의적 아비투스를 발현시키려는 경향이 짙다. 서양의 귀족이나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여기에 해당 된다.
다음으로는 소부르주아들의 아비투스다. 여기에는 사회적 상승의지와 관련하여 엄격한 의지주의나 과시적 절제주의로 대변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예를 들자면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부모들이 온갖 희생을 감수해 가며 학비를 대 주는 경우와 고액 과외비를 벌기 위해 새벽바람을 쐬고 다니는 어머니의 희생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아비투스가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의 형태다.
이처럼 아비투스가 계급적 세계관에 따라 사회적 기제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핵심기제가 바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뤄지는 ‘일상적인 교육 체계’로서 2차적 아비투스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셋째 아비투스의 사회적 기능은 도식의 문제와 직결되어있다.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순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으로 이것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는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습習)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행위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공식화(관慣)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발현함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반면에, 민중계급은 자신에게 익숙한 아비투스로 인해 지배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여기에 다양한 집단간의 이해관계를 누르고 은폐하면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른바 ‘상징적 폭력’ 이 개입하는 것이다.
라. 문화자본(文化資本, capital culturel)
일반적으로 문화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활동 과정 의 총칭을 말하며, 자본이라 함은 경제적 용어로서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생산수단이나 노동력을 통 털어 일컫는 말이다.
부르디외는 맑스와 다르게 자본을 단순한 경제적 차원에 국한 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쟁에서 도구로 사용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로 봄으로서, 경제적 갈등과 다른 갈등의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경제적 차원이외의 형태로 문제 삼는 자본은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 그리고 ‘상징자본’으로 나눈다. 여기서의 문화자본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첫째는 육화된 상태 즉 유기체의 지속적 성향들의 형태로서, 이 단계의 특징은 주입inculcation과 동화assimilation에 따른 육화를 요구하며, 일정한 시간의 개인별 투자를 요구한다. 그리고 경제자본에 연결되는 육화된 이것은 지식, 교양, 기능, 취미, 감성 등을 말한다. 둘째로 객체화된 상태다. 즉 그림이나 책, 사전, 도구, 기계 등의 문화상품으로서 법률적으로만 양도가 가능하고 특수한 전유(專有)조건에서는 육화된 형태의 문화자본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교 졸업장 같이 제도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문화란 인간생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도모하는 개인적, 사회적 실천의 성격을 띤 것도 있지만 특정 권력이나 관습의 영향을 받는 다소 억압적인 성격을 띤 것도 있다. 어느 쪽에서든 생활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데서 그 본래의 취지가 주어진다는 생각인데 현대사회에 들어 문화적 생산물들이 이윤창출의 논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배아복제 연구에 대해 가장 선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황우석 교수의 논문이 발표(2004년 2월 12일) 된 일주일 뒤에 세계가톨릭의사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Catholic Medical Association, FIAMC)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 주된 내용은 연구자들이 줄기세포를 뽑아내기 위해 복제된 인간 배아를 죽여야 하므로 이 연구가 비도덕적이란 것과 인간 생명을 고의적으로 희생시키는 행위는 비록 타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용납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생명과학 연구에 있어서의 윤리 문제는 세계적인 추세로서 우리나라에서도 그 중요성을 날로 더해가고 있다.
여기에서 제기 되었던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 결국 커다란 문제를 만드는 발단이 되었으니 이것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숙명적 병폐가 아닐까. 특히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의 공동저자중의 한 사람인 순천대 생명과학전공 박기영 교수가 논문 발표 직후인 2004년 3월에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임명 된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대 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식물분자생물학 전공자가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체세포 핵이식 논문의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무성한 논란까지 일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대한 박 교수의 해명이 이채롭다. “자연과학분야의 실험논문이지만 ‘실험 외적인’부분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의 연구과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실험외적 부분이라 표현된 것이 황우석 교수팀으로 하여금 ‘인간배아복제연구’에 관한 제 문제를 세포응용연구사업단의 윤리위원회 심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배려한 원천적 ‘힘power’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사회의 저질문화로 알려져 있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줄 대기’와 ‘뒤 봐주기’의 단적인 예 말이다. 이렇게 잘 못 체화(體化: 肉化)된 문화까지도 ‘문화자본’의 범주에 포함 시켜야 할까?
마. 학력자본(學歷資本, capital scolaire : educational capital)
학력자본이란 학교제도에 의해 주어지는 학력 및 그것에 부수되는 다양한 개인적 능력이나 사회적 가치의 총체로서 문화자본의 세 번째 형태와 거의 중복되며 첫 번째 형태와도 관련 된다. 학교의 장에서 획득된 문화자본의 한 특수형태라 할 수 있는 이 자본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의 기제이기도 하며, 학벌이란 겉옷으로 현대판 문중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봉건적 씨족주의의 현대적 변형태라 할 수 있으며 학벌과 대학서열, 그리고 그에 따른 입시경쟁 등은 제대로 된 교육의 가치를 폄하시키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경쟁력마저 떨어트리게 된다. 2003년 한국 100대기업의 대표이사 중 서울 대 출신의 점유율이 43.7%를 차지하며, 정부의 우두머리급 장. 차관의 경우 64%가 서울대 출신인 것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의 학벌문제는 구체적으로 진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 사회자본(社會資本, capital de relation social : social capital)
사회자본은 상호인식과 상호인정으로부터 제도화된 지속적 관계망의 소유와 관련된 현재적이고 잠재적인 자본으로 한마디로 압축하면 ‘인맥’이란 개념에 가깝다.
한 사람이 소유한 사회자본의 총량은 그가 동원 할 수 있는 연결망의 범위와 그 연결망에 연결된 각 각의 경제, 문화, 상징자본의 총량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상호 인정을 제도화하는 사회관계 자본의 교환은 최소한의 객관적인 동질성의 인정을 전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주장이다. 특히 일 자체의 성질과 조직의 변화 또는 사회 공간내의 상대적 위치의 변화로 인한 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치하락 과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 사회자본은 어떤 경우로든 사회적 재생산의 매커니즘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역사적으로 많은 곡절을 겪어온 우리나라의 사회에서 그 양상은 더욱 뚜렷하다.
다양화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자 물리적인 힘을 동원 시키는 기성체제나 제도에는 언제나 대규모의 반란이나 혁명에서부터 1인 시위 같은 크고 작은 저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저항의 목소리는 사회적 공론의 장에 밀려 명분조차 잃고 표류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국민의 호응도와는 무관하게 사회적 저항은 어떤 명분을 지녔든지 간에 안정과 질서유지라는 또 다른 사회 공익적 명분 때문에 기성 지배체제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지는 속성 때문이다. 근대 시민혁명은 인간다운 체제를 향한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 현실체제에 대한 민초들의 저항이 합법화된 제도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전 사회구성원들이 제도화된 공간, 즉 정치의 공간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핵심은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주의가 현실체계의 결함과 불완전에 응전하기위해 제도화된 참여 공간을 부여 하였을 뿐 그것 자체가 개인의 권리나 반 차별적 평등을 기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수혜를 받는 개인이나 집단이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내 놓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이유로 개인의 권리증진을 위한 기본 동력으로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저항행위가 나름대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번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우리는 사회자본의 명명백백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첫째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에 휩싸인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안규리 교수, 그리고 서울대 수의대의 연구진들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 노성일 씨, 미 피츠버그대 섀튼 교수와 김선종 연구원 등의 거미줄 같은 고급 인맥. 둘째 독특한 인맥이기에 가능했던 정부차원의 지원과 혜택. 셋째 걸러지지 않은 미디어의 난잡한 플레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 대다수의 국민. 넷째 국가적 권력으로 방어 막을 형성시킨 믿음을 상실한 정부. 다섯째 세계의 벽을 허물어 버린 사이버 동호단체인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 이런 제반 요인과 여건이 이번 사태의 공동 책임자라 하고 싶다.
3. 한국 사회체제 속의 문화와 권력(정치)
문화 인류학에서 가장 고전적인 문화의 정의는 아무래도 E.B. 타일러가 그의 저서 [원시문화]에서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문화 또는 문명이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및 기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능력과 관습의 복합적 총체”라 했다. 이런 포괄적 개념은 가지각색의 이론으로 정의 되어지면서 최근에는 이 개념 자체가 너무 포괄적이고 개괄적이라는 지적 때문에 어느 정도 좁혀보자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견해 중의 하나가 적응체계로 보는 견해다. 주로 문화의 발전을 연구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과, 문화를 생태학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이 견해를 취한다. 즉 문화를 생태학적으로 유용하게 사회에 전달되는 행동양식으로 여겨 인간도 하나의 동물로서 그 생존을 위해 주위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그 적응을 지배하는 자연선택법칙에 의해 규제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런 적응의 변화는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회적 측면과 종교, 의례, 세계관 등의 관념체계를 수반한다는 학자도 있다. 한편 C.레비 스트로스는 문화를 인간정신이 만들어 낸 상징체계로 보아 친족관계, 신화, 예술 등의 분석을 통하여 이들의 문화적 소산의 이항대립과 변형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화에는 사회에 관한 가치, 규범, 신화, 상징, 정보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갖가지 수준에 있는 행위자의 시책에 매개됨과 더불어 전달되는 내용을 매개로하여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권력이나 위신 등에 영향을 준다. 프랑스 사회학자 E.모랭은 문화를 구조와 체험 사이에 서로 매개하는 시스템으로 보아 문화 시스템은 인간의 갖가지 체험 속에서 공통된 축적 가능한 것을 꺼내어 저마다 예술, 문학, 철학 등의 작품 형태로 코드화 하여 문화재로서 쌓아 올리고, 이 축적된 언어와 교양 등은 그 문화 코드를 소유하는 사람에 의해 이용되어진다고 했다. 사물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에다 가치를 불어넣는 것은 인간 고유의 행위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어떤 무엇에 대한 가치실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의 역사는 인류의 생활이상을 간직한 아름다운 전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문화의 힘은 이상(理想)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비록 실제적이지는 못할지라도 실제보다 더 의미 있는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문화는 생활과 분리되어서도 안 될 생활 속 의미탐구의 역사적 과제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층 담백하고 진정성이 부여 되어야 하리란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황우석 교수 파문의 사례역시 우리나라의 문화적 코드에 빗대어 타산지석으로 삼아 추락한 과학자들의 위상을 재정립시켜야 할 것으로 보아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안들은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인간을 피 보험자로 이용하거나 인체구성물을 사용하는 생명과학 연구에 있어서의 윤리문제. 여기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윤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생명의 날 기념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개정을 위한 토론회: 2004년 5월 29일]에서 그 교회의 총무인 손성호 신부가 질병 또는 난치병을 치료할 방법으로 다른 생명을 이용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 표명을 함으로서 쟁점의 단초를 마련한바 있다. 두 번째는 연구에 사용된 242개의 난자의 출처(2004년 6월 19일 한국철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의 발표문 [21세기 생명윤리논쟁, 철학은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 치료용 인간배아복제의 연구윤리 사례분석]에서 인용)다. 여기서 황교수 팀은 인간복제 배아 줄기세포 주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16명의 난자 기증자로부터 242개를 기증받아 한 사람당 15개 이상을 채취함으로서 여성의 신체를 침해하는 의료시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셋째는 난자 기증자와 연구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 직접적인 영향을 서로에게 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연구 윤리의 기본요구사항이다. 이것은 2004년 7월 16일 외교통상부 주최로 열린 [유엔 인간복제금지협약 대응전략 세미나]에서 황교수가 자신의 말을 번복한 사례가 있다. 네 번째는 한양대 병원 IRB(임상시험심사위원회)는 난자 채취연구 계획을 심사를 거친 후 승인 하였는가? 이다. 이 IRB는 생명과학의 연구윤리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법령으로서 임상시험의 윤리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수의대의 IRB에서는 문제의 연구계획을 심사하였으며 과연 서울대 수의대에 IRB가 설치되어 있었는가도 의문으로 제기 되었다. 다섯 번째는 연구비 출처의 불투명성이다. 황우석, 문신용 두 교수의 세포응용연구사업단 윤리위원회의 규정을 위반한데 대한 비난이 두려워 정부 연구비 사용을 부인했을 수도 있다. 이것의 배경에는 두 사람의 연구에 사용된 비용이 전부 익명의 독지가가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2004년 2월 15일 ‘조선일보’)한데 반해 대규모의 연구비를 국가로부터 받아온 것이 21세기 프론티어사업 세포응용연구사업단의 단장이 누구였던가를 보아도 엄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바로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순천대 교수에서 자리를 옮겨 온 것이 공교롭게도 황우석 교수팀이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의 15인 공동저자 중 1인이었다는 사실. 차제에 한 가지 더 짚고 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대중매체의 보도자세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이 골고루 제 몫을 다 하는 민주주의사회란 것에 의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 틀을 벗어난 현실에서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의 공통적 지배 주류는 아무래도 정치권에 있는 권력이다. 영국의 철학자 B.A.W.러셀은 사회과학의 기본개념이라는 견해에 입각해 권력의 형태와 그 진화의 과정을 고찰 했다. 권력이란 강제력, 경제력, 여론을 움직이는 힘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강제력은 그것을 지지하는 복종자의 심리적 관계에 의해 전통적 권력과 대내 폭정 같은 저돌적 권력, 그리고 군사혁명 같은 혁명적 권력으로 나누었다. 그런 한편 권력을 위한 조직체 및 개인의 심리에 잠재해 있는 권력의식, 철학 속에 숨어있는 권력충동, 권력과 인간의 복지로부터의 권력억제방법, 즉 정치, 경제, 선전, 심리 및 교육 등을 들고 있다.
과정이 무시된 채 실적만 중시하는 우리사회의 병든 풍조가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 바로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배아복제 연구와 관련한 세계사적 물의가 아닐까.
한국생명윤리학회 치료용 인간배아복제 연구윤리 특별위원회 성명서(2004년 5월 22일)에 포함 된 12개 항의 질문에 대해 별다른 언급 없이 무마해 버리려든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였던가. 17~18세기 서구의 철학가들은 지적운동과 문화적 분위기를 일컫는 계몽주의란 이론을 들고 나와서 본질적 규범을 세우기 위해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이전의 상태, 즉 미신이나 편견, 야만성을 암흑이라 보고 이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 말이다. 과기인연합회의 한 회원이 이렇게 말했다. “황교수 신화에 가려졌던 부분을 모두 걷어내고 과학관련 정책과 제도를 새로이 정비해야 할 때다.” 라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권력(정치)앞에서는 들풀처럼 눕는 현실에서 민중의 등 시림을 대변해야 할 일부 언론조차도 시시한 플레이에 빠져 있음에 한숨이 나온다.
4. 결론
줄기세포 진위공방이 한창인 지금에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걸림이 있을 것임에도 감히 본 주제에 대위시켜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를 고찰 하고자 한 시도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노력이지만 치밀하게 계획되어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그리고 결코 해결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몸 사려 물러서기는 싫었고 맥 빠진 지성인의 기백이 고작 이것뿐이냐는 주변의 시선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글이 아무런 결론을 도출 해 내지 못할 지라도, 사회적 집단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특정 계급사회와의 인맥 등이 결합되어 빚어 낸 이번 사건이 한국과학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 의의를 찾고자 한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우리 국민들은 그들이 보여준 단합된 힘이 어떤 결과를 불러들이는지에 대해 절실한 체험을 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어떤 사건들의 중심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 그들의 단합된 힘이 하나 될 때 이 사회는 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결국 참여정부로의 권력이 교체된 동기도 바로 그들의 봉기가 아니었던가.
황우석 교수팀이 일으켜 놓은 파고는 가히 높고도 높다.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거대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국의 과학자들은 목을 움츠려야 했고 감정의 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언론들은 지금도 설익은 감자를 꺼내놓고 경주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생명공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여과 없는 보도가 사회적으로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개개인의 잘됨과 잘 못됨의 논공행상의 잣대에서 조금 물러나 한층 성숙된 큰 틀에서 관조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싫던 좋던 미디어의 시대에 부응해 살아가게 장치되어 졌다. 이런 맥락에서 기자들의 역할 역시 대수롭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든지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역사의 옳은 기술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지, 단순한 보도차원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생명공학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장미 빛 환상도 문제다. 이것에서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절차를 중시하는 세계사회에서 ‘사이비’란 눈짓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나라의 온라인 산업은 외국 선진국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네티즌들의 힘을 동원하여 국제 사회에서의 신뢰회복을 위한 대대적 홍보도 필요하리라. 여기에서 확실한건 대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권력의 주체인 정부에서도 양지(陽地)로 나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눅눅한 비애를 까슬하게 쓰다듬어 그들로 하여금 곰팡내 나는 음험한 구석으로부터 구출 해 내야 한다. 어찌 보면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미래는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바이오 기술의 경제성장으로의 동력 화. 이런 것들과 맞물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환경문제와 인권문제도 우리 정부의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다.
아무래도 한국생명과학 연구자들은 이번 사건의 제일 큰 희생양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연구윤리 수준을 높이는데 이번 사건이 기여한 바도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2005년 이후 생명과학 윤리의 환경은 한층 개선되어질 것이 자명하니 말이다. 모든 지구가 하나의 촌락으로 규정 되어지는 현 시점에서 응용윤리학을 포함한 일반 철학과 제반 학문이 기여 할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본질상 학제적 분야라고 치부 해 버릴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면 결코 어떠한 도전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참고문헌
o 현대문화와 철학의 새 지평(한국 철학회 편),2005 철학과 현실사
- 현대사회와 인간개념의 위기(김희봉)
- ‘사회’의 의미와 위상에 대한 반성적 고찰(김석수)
- 황우석. 문신용교수의 치료용 인간 배아복제 사례분석(구영모)
o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2005 휴머니스트
- 생명복제기술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김훈기)
- 문화는 생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가?(강성원)
- 인간사회에 저항은 필연적 현상인가?(조희연)
- 학벌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가?(김상봉)
o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하, 1995, 부르디외(최종철 옮김), 새물결
o 문화생산과 지배(논문), (이상길)
o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참여와 미디어 실천(논문), (이상길),
o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2004, 홍성민 살림출판사
[출처] 논문(부르디외의 구별짓기)|작성자 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