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완호<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미송
2011. 9. 8. 18:43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 박완호
사랑한다고 썼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의 부재를 긍정하는 일, 물 위를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에 얹힌 눈길에 잠깐 머뭇거리는 수면의 굴곡을 감지하는 일, 누구도 읽어내지 못한 너의 잠언을 해독하는 일, 네가 밟아온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헤아리는 일, 찡그린 이마에 파묻힌 번민의 무게를 재는 일, 눈금을 읽던 저울까지를 버리는 일, 또는
바짝 말라 있던 꼭지에 물기가 감돌게 하는, 숨어 있던 꽃봉오리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창백하던 하늘을 한순간 홍조로 물들이는, 캄캄한 숲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새의 문장을 끄집어내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계간 『시인정신』 2011년 여름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안의 흔들림』(시와시학사, 1999)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천년의시작, 2003) 그리고 『아내의 문신』(문학의전당, 2008)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