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오이를 씹다가> 외 6편
1
오이를 씹다가 / 박성우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집에 첨으로 놀러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릿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테기에다 거시기를 해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꼭다리가 요렇코롬 쓰다냐
2
감꽃 / 박성우
옹알종알 붙은 감꽃들 좀 봐라
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었단다
그새,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니?
저도 그래요, 아빠
웬, 약주를 하셨어요? 아버지
비켜라 이놈아,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담장 위로 톱질당한 감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파리떼처럼 덕지덕지 붙어 흔들렸다
몸을 베인 뒤에야 제 나이 드러낸 감나무
나이테 또박또박 세고 또 세어도
더 이상의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베어졌다
그해, 장마는 길었다
톱으로 자를 수 없는 것은 뿌리였을까
밑동 잘린 감나무처럼 나도
주먹비에 헛가지를 마구 키웠다
연하디연한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쉽게 몸살을 앓는 자식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중심은 서지 않았다
이듬해 우리는 도시로 터를 옮겼다
아버지는 지난 겨울에 흙집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가장 큰 안식을 얻었다고 했다
왜 찾아왔을까
상추밭이 되어버린 집터
검게 그을린 구들장 몇 개만 햇볕에 데워져 있다
세상 겉돌던 나무 한그루
잘려진 밑동으로
감꽃이 피려는지 곁가지가 간지럽다
3
-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가 있다.
그러나 인자(仁者)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가랑잎 한 장, 생쥐처럼 눈을 반짝이며 살곰살곰 기어 나온다. 두리번거리다
달리는 차에 놀라 뒷걸음친다. 가드레일에 등을 바짝 붙인 채 놀란 숨 몰아
쉰다. 바람이 휙 불어오자 마른 몸 중심을 못 잡고 펄럭인다. 신호가 바뀌
고 차들 멈추어 선다. 꼬리를 내린 가랑잎 한 장 움찔움찔하며 건너간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여의도 잉카라 공원, 벤치에 때 절은 이불을 널어 말리
고 있다. 더듬이마냥 뻗은 몇 가닥 수염과 노랗게 바랜 세모난 얼굴, 지난밤
골목길에서 뒤를 밟아오던 작은 눈이 반짝 나를 본다. 내가 들고 있는 커피
를 본다. 커피를 건네고 뛰어 달아난다. 등 뒤에서 펄펄 웃음이 날린다.
자정이 넘은 영등포 역, 박스는 인자(人子)가 겨울을 나기에 좋은 둥지다. 박스
안의 가랑잎 한 장 구겨진 채 잠들었다. 귀가를 서두르는 구두 발자국 소리
컹컹 역사를 울릴 때, 굽은 등 더 웅크린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섬뜩한
냉기를 끌어안으면 미치든 죽든 조만간 그림자는 찾아오리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늘 어둠 쪽에서 손짓하는 운명을 향해 기지개 활짝 펴 보이는
박스 위로 삐죽이 나온 가랑잎 한 장
* 성경 누가복음 9장 58절
4
화가 뭉크와 함께 /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 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고?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 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우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시집[사랑의 탐구][문학과 지성사1987]
온전한 소리가 되지 못하는 눌변과 더듬거림이 시를 읽는 사람을 내내 불편케 한다. 버벅대는 절규는 뭉크의 그림 이미지에 오버랩 되어 공포와 절망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는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80년대 사회를 절규하듯 고발하고 있다. 세기말의 학살극과 보트피플을 병치하여 이 세계의 절망감을 표출하는데,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 태연하게 벌어진다. 무력한 시인 역시 시대와의 공범의식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노르웨이가 낳은 위대한 화가 뭉크의 “절규”는 핏빛 하늘을 배경으로 세상사에 괴로워하는 인간내면의 고통을 묘사한 그림이다. 충격, 불안, 경악, 절망감으로 엄습한 “절규”는 무엇에 대한 것이며, 이 그림을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뭘까? 미술평론가들은 이 그림 속 인물은 뭉크 자신이며, 또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들 자신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몇 번씩은 절망감을 느끼고 깜짝깜짝 놀랄 일들을 경험한다. 그림의 인물처럼 공포와 경악의 광경을 일상 속에서 겪는다.
어둡고 불안정하며 우울한 인간사를 대범하게 파고든 점이 뭉크 예술의 진정한 가치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희망보다는 절망을 표현한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그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기에 지지를 얻는다. 그런 관점은 문학에서도 통용되는데, 평론가 김현이 기형도를 두고 말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절망의 시선으로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태도로서, “절규”는 뭉크와 이승하 시인 두 사람의 자화상인 동시에 언젠가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절규와 이 시에는 그들이 세상을 알게 되면서 받았던 충격과 공포가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뭉크의 “절규”만큼 두려움과 공포를 단순화시키고 또 극대화시켜 노골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없었으며, 이 詩도 유사한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의 표현이다. 아무리 외쳐도 그 절규의 소리가 목구멍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공포가 금세기의 배후에서 야금야금 엄습해오고 있음을 느낀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대구일보 2011년 9월 27일]
5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시 사이
시집[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2011]
6
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7
이미지 / 이윤학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한다
가야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이윤학 시집[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 지성사]
8
나의 포르노그라피 / 박이화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덜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9
사슬 / 이성부
내가 당신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나는 아직 당신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웃는 것 같았고 우는 것 같았고 온갖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섞인 그 소리는 나의 머리끝 발끝을 끝없이 돌아나갔습니다 그 소리에 잠겨 나도 당신도 잊혀지고 헤아릴 수 없는 윤회의 고리들이 반짝였습니다 반짝임 사이로 어둠이 오고 나도 당신도 남이었습니다
10
밤안개 / 박이화
나는 알지. 지금 그가 저 검은 복면 속에 숨어서 내 창을 엿보고 있다는 걸. 밤새 뜬눈으로 떨면서 내가 잠들기만 기다린다는 걸. 이제 곧 그는 밤공기처럼 차갑고 서늘한 기척으로 내 방을 침입해 오겠지. 나는 모르는 척해야지. 그러면 잠든 척하며 가슴 콩콩거리는 내 머리맡에 앉아 더듬더듬 내 꿈의 서랍을 뒤적이겠지. 정말 그는 모르는 걸까? 내 아직 잠들지 못해 내 꿈이 공백인 것을. 어쩌면 그도 한 번쯤은 수상히 내 안색을 살필지도 모르지. 그러나 끝내 눈치 채진 못할 테지. 그는 너무도 순진한 바보 엉터리 밤손님이니까. 아마 오늘도 그는 빈손으로 돌아가겠지 골목골목의 가로등 초소는 잘 비켜갈 수 있을지......이따금 사나운 순찰견처럼 크르릉거리는 난폭 택시도 안전히 피해갈 수 있을지.....
어둠 속에서
붉은 사이렌 불빛처럼 번쩍이는
이 위험한 그리움
빗길에,
그는 무사히 잘 돌아 갔을까?
*타이핑 by, 鵲巢(시마을 창작방 활동)-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