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짧은 시간>외
1
굶어죽을 뻔했던 마을을 나는 어떻게 살려내었나
그날 밤 꿈에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허리께가 마음에 들 만큼 폭신해졌지
나는 둥둥 떠갔지 얼마만큼 갔을까
그곳은 배고픈 마을
내겐 마흔여덟 개의 젖꼭지가 있었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다네 어쩌면 좋을까
나는 다시 꿈을 꾸기로 했네
아주아주 뚱뚱해지는 꿈을
이번에는 모양이 좀 없었지
출렁출렁거렸지
그러나 그 마을에 다시 가 보니
거의 굶어죽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네
나는 산꼭대기에 올라
폭포처럼 오줌을 쏴 대었네 그러나 어림도 없어
어쩌면 좋아
나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았네
굶어죽는 마을의 쩔쩔매는 엄마는 되기 싫었어
어쨌든 그게 꿈이라는 건 다행이었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꿈꾸지 않기 위해선 잠들지 말아야 했어
어느날, 내가 쇠꼬챙이처럼 말라버린 날
나는 그만 길가에 쓰러지고 말았네 그리고 꿈을
꿈을 꾸었죠 아주아주 커다랗고 폭신하고 출렁거리는 꿈을
난 푸득푸득 날아서 그 마을로 갔죠 왜냐하면
팔다리가 너무 뚱뚱해져서 날개를 칠 수가 없었거든
모양이 말씀이 아니었어
어쩌다 이런 몰골이 되었을까
난 눈물도 안 나왔어
이게 꿈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리고 내 마을이 보였어
쇠잔해진 마을
내가 꿈꾸지 않는 동안에도
여전히 굶어죽고 있던 마을
난 마을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죠
내 몸은 한없이 퍼져서
마을 하나를 덮고도 덤이 좀 남았죠
짭짤맵싹하고 따끈한 빈대떡 내 몸이
마을 위로 내려 앉았죠
그리고 푹 가라앉았죠 더 이상 꿈에서 깨지도 않고
2
노튼 체인지 디렉토리(NCD)
당신의 대뇌피질 속에 NCD를 설치하고 싶어.
나는 단 일격에 당신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루트이고 싶어.
당신 대뇌피질 속의 NCD는 당신을 언제나 정해진 길로
가게 하겠지. 나는 앞질러 가 기다릴 수도 있어. 한두 계단
건너뛰었어도 안심이야, 언제라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
어, 나는 길을 알아.
거룩한 츄리 디렉토리는 내 마음의 기둥,
일목요연은 나의 구원,
하지만 내 욕망이 완전한 지배에 있는 것은 아니야.
나는 다만 속속들이 알고 싶은 거야.
내가 너와 다르다는 것의 그 다름성에 관하여 혹은
그 역에 관하여,
달라야 하는 그 비밀에 관하여.
욕망이 입을 열어 준다면 그 속에서 세상을 발견하겠어.*
오, 그런데
우린 서로 호환기종이 아니라고?
*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을 적당히 변주함.
3
짧은 시간
그가 떠나고 난 다음
내가 왔다
우리는 어긋나 버려 살아 생전
더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와 닮은 아무에게나 입을 맞추고
머리채를 풀어 발을 닦는다
끝없이……
이제 그와 만나지 못한 책임은
내게 없다
비록 내 마음이 쓸쓸하지만.
슬퍼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 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들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4
실업
그이는 세 끼를 굶고 귀천이 없어졌다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처음에는
무슨 큰 사업을 할 둣이 떠벌리다가
약간의 현금을 빌린다(쌀 한 말 값이 고작이지만)
꼭 갚겠다고 이자까지 약속한다
쓰잘데없는 자존심과 그 뒤에 숨은 무능이
그이를 그렇게 만들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 말은 옳다
부분적으로 그이는 틈만 나면 사장과 싸웠고
(사장이 틀려 있는 적이 많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는 일마다 하필이면 막차를 타곤 했다
부모를 잘못 만난 유산이 없어
팔자가 그런 걸 어떡하냐고들 이야기한다 그 말도 옳다
조금은 그러나 의로운 재산은 살아 있는 모든 이의 것
그이의 피와 땀, 그이 조상의 살과 뼈도 들어 있는 것
그이가 받아야 할 대가가 남만큼 호사를 누리지 못하는
(중앙 난방의 서른 평 아파트, 가사에 전념하는 마누라,
한 달에 두어 번은 카페에서 가서 한잔 꺾는)
정도라면 족했다
세상에는 일하지 않고 먹는 돈이 너무 많아
일하고도 굶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고
실업은 근본적으로 구조적 불의의 문제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너무 작다
막상 우리가 그이를 만날 때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인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쉴새없이 움직이며 저도 모르게 마주 부비는 그이의 손이
시뻘겋게 부끄럽게 드러내기에 저마다 변명에 급급할 뿐 이것은 어디가지나
그의 탓, 너의 탓, 저들의 탓.
내가 쌀 한 말쯤 보태 주고 되돌려받을 생각을
안 한다 해서 의인일까
여섯 달, 혹은 일 년쯤을 그럭저럭하다가 그이는
이윽고 자식 셋을 데리고
변두리의 진흙탕 속으로 밀려가겠지
그러면 나는 또다시 마음이 편해지겠지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면서
5
저녁 해의 노래
저녁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흐르는 모래에 함께 흘러가는 노래를 들어요
손톱 끝에 스치는 바람을 마셔요
이렇게 많은 노래를 내가 불러주는데
네 심장은 왜 쿵 쿵 쿵 뛰지 않는 거냐고
파도가 한 번 무릎을 때리죠
붉디붉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하늘이 내 얼굴을 한 번 쓰다듬네요
하루의 딱 한 스푼만큼만
내 차지가 되는 극진한 고요의 복판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네요
나에게 들리지 않는 빛의 노래를 들려주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강물에 투신하는
붉디 붉은 그대가 있네요
저녁 강물에 손목을 담그고 앉아
흐르는 모래의 리듬에 몸을 맡기죠
풀어져 모래가 되죠
6
지상의 평화 3
- 수호천사
1
그의 어깨에 돋아 있던 것은 분명 날개는 아니야.
날개라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뼈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거대한 그것은,
그의 어깨가 숙여질 때마다 어쩔 수 없어 슬프다는 듯
갑자기 툭 처져 버리는, 살대 꺽인 우산 같은,
그것은 어쨌든 날개는 아냐.
그럼 그것이 뭐란 말이지?
하도 오래 살아 낡은 얼굴,
나 때문에 속이 썩었다고 겹겹이 주름진 얼굴을 내보이는
어느 영혼이 덧없이 죽은 다음 내게로 덤핑이 된
무능한 내 수호천사의 어깨에 돋아난 그것은?
2
내 수호천사는 주기적으로 몸살을 한다.
내가 무겁다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내 침대머리에 붙어 앉아 거의 지워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지치고 낡게 만든 것이 흡사 나에 대한 근심이라는 듯,
내가 걱정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던 내 운명에 대한
끝없는 근심이라는 듯,
어깨를 뒤집어 방바닥에 드러눕는 그.
3
어느 날, 그의 어깨에서 실뿌리가 뻗어 나와
슬금슬금 땅을 향해 파고드는 걸 난 느꼈어
조용히 그의 등에서 내려와 땅을 딛던 나는
업힌 것이 내가 아니라 그였음을 알았지
우리는 나란히 누워 그의 날개를 찢었어.
탈바꿈하는 곤충처럼 바삭바삭해진 날개
새 날개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근심하는 그에게
약속했어
내가 줄 수 없는 걸 주진 않겠다고.
내가 주어야 하는 것은 꼭 주겠다고.
7
가을날
오늘 하루는 배가 고파서
저녁 들판에 나아가 길게 누웠다
왜 나는 개미가 되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가난했다면
허리가 가늘고 먹을 것밖에는 기쁨이 없는
까맣고 반짝거리는 벌레였다면
하루 종일이 얼마나 행복할까 먹는 일말고는
생각해야 할 아무런 슬픔이 없다면.
8
간음
입술에 입술을
팔에 팔을
불신앙에 불신앙을
포갠다
너의 팔
너의 혀
네 눈물
내 눈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음을
사하소서
9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 보았죠
이야기 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댈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 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왔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네이티브 스피커 1
내 속엔 너무 많은 소리가 들어 있지
들어있다구, 들어볼래?
우선, 비명의 일종들, 으악악악악
꺄악악악악
샤람샬류유우우우우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엄마아아아 잘못잘못 해써요
요오 오 오
(오랫동안 쉰다 침울한 기분으로)
비명부터 시작한 것은 실수였나 봐
씨퍌, 주는 것 없이 기분 나쁜 날엔(바로 지금)
기분 전환을 위해 난 각종 소리를 내지
오레호레호레 요루루루 둥기당뚱땅 오로로로 깍꿍
난 지금도 소리를 내지(그렇구말구)
찌기지기짜가자가쪼고조고오옹
이 많은 소리들은 어디서 왔을까
왜 국어사전엔 실려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내 귀는 소리를 들을까
(상당히 고전적인 질문)
(상당히 상식적인 질문)
자, 다시 한번, 짜연스럽게
아아아
속귀가 다 멍멍해지네 이렇게 많은 비명이
허파꽈리 속에서 막 터지고 있는걸
스물 두 개의 내 얼굴이
눈물로 흐려지고 있는걸
10
껍데기는 가라
쪽파를 까면서 나는 울었네
남의 껍데기를 벗기는 데 비전문가인 나는
어디서부터가 속살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네
수북이 수북이 쌓아 놓았네 파릇파릇한 껍데기의 무덤
껍데기는 가라? 그래, 껍데기는 가야지……
나도 마음속에 파밭을 키웠네
향그런 꽃가슴 같은 파밭
내 눈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파밭
(그래 봤자 단에 오백 원인 파밭)
누군가 내 껍데기를 벗기다 못해 아직
풋풋한 내 망설임이나 자랑이나 희망까지도
미련 없이 내다 버릴 것이
두려워서 나는 울었네 쪽파를 까다 말고.
11
고백성사
가을에는
딱 한 번만
후회할 수 있다면
떨어져 죽지 않은 씨앗들을 가슴에 품고서
나는 무슨 욕심이 그렇게도 많았던가
열매 맺지 못한 나무의 머리 위에도
시월의 태양은 아낌없이 내리쬐는데
절대로 고운 꽃을 피우지 않으리라
맑은 이슬을 이고 미소짓지도 않으리라
내 인생을 헛되이 살아
가을이 깊어가면 조용히 시들어 버리리라
나는 맹세하고 맹세했었다
당신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딱 한 번만
후회할 수 있다고 하면
먼 새벽
닭 울기 전 삼백 번이라도 그대를 모른다 하리
삼천 삼만 번이라도 모른다 하리
낯선 형제를 벗하여 집을 짓고
세상 끝에 온 듯 문을 닫아 걸고.
결코 하늘을 우러르는 일 없으므로
그대 푸른 눈과 만나는 일도 없으리라.
이제 곧 밤이 온다.
젖은 풀에 누워 긴 잠 들어
삼천 년 삼만 년이라도 깨어나지 않으리라.
아무도 그대를 불러 주지 않았고
나도 그대 이름을 모른다. 어디선가,
내 그대를 사랑하여 무화과나무 잎사귀 뒤에
숨어서 울었던 것은
사실일까
12
행복한 산책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넝마, 덜거덕거리는
오래된 절간의 목어처럼
걸려 버렸으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았네
그저 한없이 걸었다는 기억
기억 속의, 수많은 발자국과 그림자들
찬란히 빛나는 검은 뼈
어둔 밤 숲속 길을
밝히는 오래 묵은 인광
그랬었네
아마 전생의 산책이었는지도 모르지
길이 끝난 것 같은 곳에서
난 내게 전화를 건다
이젠 길이 끝난 것 같다고
펄럭이지 말고
후두둑
무너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