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티베트의 영혼

미송 2011. 10. 21. 17:27

 

 

         

                                                          초몰랑마(일명 에베레스트)정상의 신령스런 모습. 가난함 속에서도 순박한

                                                                       종교적 심성을 잃지 않는 티베트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는 빈곤함 속에서 그녀가 희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였을 것이다. 딸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부처님께 보살님께 그저 빌고 빌 뿐이다. 그것은 거렁뱅이의 기도가 아니었다. 험한 세상에 등 떼밀려 딸을 업고 사원 문간까지 왔지만, 그녀의 눈에는 어느 누구에 대한 원망도 혹은 비굴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세계, 즉 빈곤함과 고결함을 그녀에게서 동시에 발견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빼앗겼어도 없어지지 않고 빛나는 성스러움, 나는 그것이 바로 티베트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초몰랑마'라고 부르는 산봉우리와 같다.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을 지닌 이 산은 우리에게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영국인들이 1865년에 조지 에베레스트라는 자기네 지리학자의 이름을 따다가 붙인 것이다. 흰 눈을 머리에 인 채 품을 벌리고 있는 이 산은 하루 아침에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름을 빼앗는 영국인들이라도 그 영봉의 성스러움까지 빼앗을 수야 있겠는가.

 

선글라스에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라싸의 거리를 활보하는 관광객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밭고랑처럼 깊은 주름이 패인 티베트인들을 바라보며 기묘한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문명인의 자부심이나 정복자의 쾌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마니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로 절을 하는 그들의 모습조차 구경과 기념촬영의 대상일 뿐이다. 사원에 들어가면 코를 찌르는 야크 버터의 냄새에 고개를 돌리고 역겨워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신의 천형(天刑)을 받고 이 곳에 유배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산소조차 부족한 이 척박한 땅에 빌붙어 살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의 세계와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과거 수많은 수도자나 신비주의자들이 무엇 때문에 고행과 금욕의 길을 택했을까.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안락한 집, 맛나는 음식, 따스한 옷, 이런 것들이 신에게로 다가가려는 발걸음을 잡아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티베트인들은 스스로 이 험한 곳을 선택한 것도 또 원해서 가난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해치고 원망하는 강팍한 마음을 갖지 않고 영혼의 구원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누구보다 고귀해 보인다. 깨끗이 정장을 차려 입고 자가용을 타고 가서 헌금을 하면서 스스로 신앙의 포만감을 느끼는 내가 과연 그들 앞에 떳떳이 마주 설 수 있을까.

 

티베트인들이 겪어 온 역사에는 그들의 얼굴처럼 고난이 남긴 깊고 굵은 주름 속에 자부심과 경건함이 배어 있다. 이제 지나온 그들의 역사가, 또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조용히 경청해야 할 때가 아닐까. 

 

 

              

                                                         황하 발원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숙해의 모습. '별이 잠드는 바다'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성숙해(星宿海)에서

 

언젠가  <대황하>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을 때 조그마한 호소(湖沼)가 수없이 깔려 있는 모습이 마치 밤하늘에 별들이 박혀 있는 듯했고, 정말로 '별이 잠든 바다' 바로 그것이었다. 예부터 "황하는 위로 하늘에 닿아 있고, 그 발원지는 성숙해이다"라고 해 왔고, 시인 이태백(李太白)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것을!"이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청양 갸초의 노래

 

보통 나이 어린 달라이 라마는 5~6세가 되면 머리를 깍고 법명을 부여받은 뒤,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경전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런 기초적인 교육과정을 끝내면 그는 살생이나 도둑질 혹은 거짓이나 간음 등을 하지 않는다는 36조의 계율을 준수할 것을 맹서한 뒤 '게출' 즉 사미계(沙彌戒)를 받는다. 이 과정이 완료되면 보다 높은 단계의 교육을 받게 되며 18~20세의 성인이 되면 드디어 완전한 승려가 되기 위해 '겔룽'(gelong)의 계를 받는다.

 

청양 갸초는 준수한 외모에 영민한 두뇌를 지닌 젊은이였으니 장차 티베트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재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승려로서 필요한 수업보다는 활쏘기나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즐겼다. 일찌기 판첸 라마로부터 사미계를 받았고 이제 성인 승려가 되기 위해 필요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아야 할 단계가 되었다.

 

(중략)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고 티베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애정시를 남긴 사람이었다. 다음 세 편의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연애하고 즐기고 싶지만 승려로서의 처지 때문에 갈등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여쁜 임을 따르려니

불도를 걷기 힘들고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려니

임을 그리는 한 조각 마음이 걸리네.

 

                     * 

 

지성을 다해 떠올리는 부처님 얼굴은

도무지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데

생각지 않으려는 임의 얼굴은

더욱더 또렷이 떠오르네.

 

                      *

 

내 마음을 온통 빼앗는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맺어질 수만 있다면

그대는 바닷속 가장 깊은 바닥,

그 곳에서 건져 낸 예쁜 보석이리.

 

1706년 호쇼트 병사들은 청양 갸초를 포탈라 궁에서 끌어 내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을 안 티베트인들은 호송대를 습격하여 그를 구해 냈고 라싸 북방에 있는 한 사원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곧 호쇼트 몽골군이 사원을 포위했고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을 걱정한 청양 갸초는 스스로 몽골군에게 몸을 내주었다. 청양 갸초는 그들에게 끌려가기 직전에 자신의 심정을 적은 짧은 쪽지 하나를 애인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뜻을 알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시가 한 수 적혀 있었다.

 

내게 그대의 날개를 빌려 주오, 흰 두루미여!

나는 리탕에서 다 가지는 못하리.

거기서 다시 돌아오리라.

 

리탕은 디베트 동부에 있는 한 마을의 이름이고, 몽골군은 청양 갸초를 동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끌고 갔으니 그가 리탕에 간다는 말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후일 그의 전생인 제7대 달라이 라마가 발견된 곳이 바로 리탕이다. 따라서 이 시는 몽골군에 끌려가는 자신이 전생의 몸을 빌려 리탕에서 라싸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예언한 셈이었다.  

 

김호동 역사에세이 <황하에서 천산까지> 중에서, 

 

채란 타이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