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선<수몰지구>
수몰지구(水沒地區) / 안희선
지금은 폐허가 되어가는, 마을
공허한 건물들만 늘어선 횅한 거리를 지나서,
문득 돌아보면 한 없이 음울하고 적적하다
사람들이 떠나간지 그 얼마나 되었다고,
이내 벌써 가는 곳마다 이끼와 풀이 무성하다
정처없이 불어가는 바람에 측은히 귀 기울이면,
희미한 옛 노래가 가슴을 욱조인다
그것은 정겨웠던, 시절의 아련한 향수(鄕愁)일까...
정(情)으로 서로에게 살가웠던 주민들은
모두 서둘러 떠나가고, 을씨년히 나붙은
수몰예정지(水沒豫定地) 공문(公文)만 죽은 다음처럼 가벼이
마을 어귀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이제 오랜 동안 차가운 물 속에 잠길 거란 걸
이전(以前)에도 스스로 알아차렸다는듯이
마을은 창백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이곳도 한때는 따스한 사람들이 살았노라고,
저녁노을은 추상(追想)하듯 하늘에서 궁시렁거리고
싸늘하게 늘어선 빈집들만 저절로 어두워져
몰락(沒落)한 풍경을 그린다
먼데서 밤은 검은 망또를 서서히 두르고,
이제 사람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같은 마을
어디선가 등장한
날고기 탈을 쓴 박쥐 한 무리,
온 하늘을 까맣게 덮는다.
고은 시인의 ‘문의(文義)마을에 가서’란 시가 떠오릅니다. 문의마을을 저도 본적이 있죠. 대청댐을 지나 우리 일행은 곧잘 그 곳으로 가곤 했어요. 일단 조용했으니까. 삶과 죽음의 풍경을 별반 차이없게 덮어 주던 그때의 그 눈발들이 이 마을에도 날리고 있군요. 시선과 시선 사이 또 하나의 상념을 낑겨둔 채 시를 보네요. 글자조차 슬프게 보이는 수몰예정지역. 인간의 욕심을 물의 범람에 비유한다면 그와 상반된 경우는 수몰이라 부를까요.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그저 情 하나로 연기를 피워 올렸을 것 같은 옛 자취들이 박쥐들의 그림자와 함께 서서히 지워지고 있군요. 저무는 풍경을 보자니, 우리의 삶도 수몰예정지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야 말 운명을 지녔음을 부인할 수 없어요.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나팔꽃처럼 카이로스의 한 찰라이자 一色인 우리이기에 詩를 듣는 매 순간을 사랑하나 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