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엽<시선의 시학2>
눈에서 열이 날 때
열목어를 생각한다
<열목어> 부분
열목어라는 이름은 눈(目)이 뜨거운(熱) 물고기라는 뜻이다. 열목어가 실제로 눈이 뜨겁기야 하랴만은 어쨌든 맑고 차가운 물(여름에도 수온이 20도씨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에서만 산다는 것은 사실이다. 시의 화자는 눈에서 열이 날 때 열목어를 생각한다. 도시의 욕망을 대변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눈의 발열 원인인데, 열이 나는 눈을 화자 자신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묻는다.
의사 선생님
제 눈이 매음굴처럼 벌개졌나요?
아니면 정육점 불빛처럼 불그죽죽합니까?
- <열목어> 부분
‘걸림없는 맑은 시선’에 탈이 난 것이다. 그 시선은 본래부터 자신을 보지는 못하는 시선인 것인데 탈이 나자 비로소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피와 눈물과 고름으로 눈구멍이 뒤범벅이 되어도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을 종속시키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것도 일종의 탈남이라 할 수 있다.
들장미는 재 흘러내리는
철로변에 있었다
그것은 피사체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들장미가 있었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향기로운 한 송이 인간이 아니었다
- < 재 위에 들장미> 부분
사진기가 피사체를 찍으면 피사체의 영상이 필름에 고착되는데 이 때 피사체는 영상과 사물 자체로 분열된다. 사진기에 의해 영상이 생겨나지만 여기서 사물 자체는 소외되어 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확고한 원근법적 시선과 대상의 관계가 바로 그러하다. 위 인용 시는 그러한 관계를 부정한다. 들장미라는 사물은 피사체가 아니고, 그것을 보는 화자의 시선은 사진기가 아니다. 들장미는 ‘나’의 시선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시선’ 과 ‘언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그래서 시인은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들장미가 있었다”라고 쓴다(이 구절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유명한 시구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시제이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서술되고 있으며 위 인용 바로 다음이 “우울하게 나는 다시 길을 갔다/그 뒤로는 이십 년을 무겁게 나는 걸어왔다”인 것을 보면 이 시는 이십 년 전의 사건에 대한 회상이고 이십 년 만에 재발견하게 된 깨달음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십 년 전이면 시인의 전기에 비추어볼 때 1982년 시인이 사북을 떠날 때에 해당된다. 세 번째 패턴은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이라는 패턴이다. 이 자기 응시는 우선 그림자를 통해 가능하다.
물 아래 너펄거리는
희미한 그림자 본다
- <그림자> 부분
화자는 얕은 개울 바닥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헤엄치는 잔고기들이 발 때를 다투어 먹는 것을 보는 이 자기 응시는 일종의 자기 인식을 형성시킨다. 그래서 “내가 잠시/더러운 거인 같다.” 그러나 보다 온전한 자기 응시는 거울을 통해 가능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 <거울> 마지막 연
거울은 나르시시즘의 상징이고 라캉적 의미에서의 상상적 자기 인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상상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주술적 능력을 가진 물건이기도 했다. 위 인용 시의 거울은 화자가 미처 알지 못하던 자신의 노화를 보게 해주는 거울이고, 그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는 허상 너머의 진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주술적 거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특이하게 나타나는 거울 이미지는 이러한 자기 응시와는 아주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것은 눈꺼풀 없는 눈, 속눈썹 없는 눈, 눈동자 없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마가 늘 깨어 있으려고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아무튼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 눈은 우리를 무심하게 보고 있다. 허공은 얼마나 큰 거울이며 無邊眼인가.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통째로 맑고 고요한 눈알이 허공이다.
- <거울과 눈> 부분
이 거울은 자기 응시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다. 눈꺼풀이 없어서 감겨지지 않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는 타자의 시선인 것이다. 이 거울은 끔찍한 거울이다.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통째로 맑고 고요한 눈알”이라니! 이 거울의 시선은 감시의 시선이며 더 나아가서는 주체를 소멸시키는 시선이다. 주체는 그 시선 속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거울 속으로 흘러간 그림자들은” “누가 노를 저으며 물 밖으로 건져낼 수 있는/익사체들 같은 것이 아니다” <붉은벽돌집의 가을에> 부분. 그것들은 다만 사라질 뿐이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분별조차 사라져버릴 때 “사라진다는 것은 눈썹을 다 지우고/눈동자도 없이 투명한 눈을 뜨는 것”<물허벅> 부분 이라는 진술이 나온다. 이것이 네 번째 패턴이다.
눈앞에는 그저 선 하나로 존재해도 되는
수평선이 있었네
-<피서지에서> 부분
의 수평선이 이 패턴에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 존재하는 것
수평선은 하나의 불사신이 시선이다
-<수평선> 부분
으로 변화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 네 번째 패턴의 시선이다.
1)
정오 무렵, 섬을 가로지르다
평지처럼 밋밋해진 무덤을 밟고 서 있는
수염 진 염소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
-<아지랑이> 부분
2)
고양이는 목털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쓰레기자루 옆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검은 고양이> 부분
3)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오늘도 문명의 잔해를 나르는 곳, 그 입구를 지키며
엎드려 있는 검은 개는
스핑크스처럼
짖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부분
이 시선들 앞에서 ‘나’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 불안은 감시받는다는 게 대한 불안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이다. 위 인용 시의 수염 긴 염소, 검은 고양이, 검은 개 들에 비해 더욱 강력한 타자의 시선 앞에 노출될 때 그 불안은 극대화된다. 가령 앞에서 보았던 ‘거울로서의 허공’이라든지 “우리 죽을 때”에야 “눈부신 시선을 거두어갈” 태양(‘자연’ 부분)같은 전능한 시선 앞에서 그러하다.
나는 늘 불길해지는 미래의 오늘로 끌려온 것 같다.
뭔가 좋아질 것 같았던
그러나 불안의 아가리만 더 크게 벌어진
오늘
- <끈> 부분
너무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이 불안을 실존적 불안이라고 부른다면 이 실존적 불안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불안의 원인이 타자의 시선에 있으므로 그 시선을 벗어나는 데서 불안의 극복이 가능해지리라고 우리는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추측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지를 알기는 어렵다. 가령 죽음을 통해 벗어나는 것은 진정한 극복이 아닌 것이다.
첫 번째 패턴의 시선으로 보자면 본래적 의미의 자연으로부터 긍정적 전망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은 사실은 본래적 의미의 자연이 아니라 이미 원근법적 시선에 의해 구성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껏해야 알리바이를 제공해줄 따름이고, 네 번째 패턴의 시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다. 원근법적 시선의 탈남을 경험한 시인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돌(영원)과 물(재생)의 이미지의 대부분이 결코 순진한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히려 시인은,
황홀에 젖어 흘러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구더기들이 흘러나오는 썩은 시체
(.......)
그 위에서 태양이 우리 죽을 때
눈부신 시선을 거두어갈 것이다
- <자연>첫 연과 마지막 연
라는 식으로 불안을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하고(반어적 생태시의 교훈성으로만 읽는다면 이 작품은 얼마나 재미없는 것으로 변해버리는가!).
우리는 한계 속에 살다 무한 속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한을 누리다가 한계 속에 죽을 것이다
- <수평선> 부분
라는 식의 전도를 시도한다. 이 전도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효과적인 전략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극단적 묘사와 전도가 결합할 때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시편이 탄생한다.
밀가루반죽덩어리를 주물럭거리다
두 손이 반죽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의 느낌을
식충식물에 붙어 흐느적거리던 벌레들과
끈끈한 성의 魔性에 곤혹스러워했던 남녀는 이미
충분히 느껴 보지 않았을까
웨딩드레스 걸친
유리 속 마네킹들은 한때
물렁물렁한 회반죽덩어리,
두개골이 텅 비고 본능이 제거된 그것들은
붕대에 둘둘 말린 키 큰 미라를 떠오르게 한다
마네킹과 콘크리트와 철근鐵筋의 도시에서
물질적 반죽으로 부풀어 오르고 싶은 비,
그것을 과연 누구의 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진액에 뒤섞인 빗물이 나의 것인지
빗물에 뒤섞인 진액이 비의 것인지
폭우가 쏟아진다
기우제를 올린 사람들마저
익사체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퍼붓는 폭우, 스며들 곳 없이 갑자기 불어나며
이리저리 거리를 몰려다니는 물,
그 물은 굳이 방황하는 물이라고 분류해야 하나?
- <비 분류법> 전문
순진한 자연시의 맥락에서 본다면 위 인용 시의 물은 긍정적인 물일까. 부정적인 물일까. 이것은 우문이다. 이 시는 순진한 자연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물은 에너지의 액체적 흐름이다. 그 흐름은 “물질적 반죽으로 부풀어 오르고 싶”다. 도시를 구성하는 마네킹과 콘크리트와 철근은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지만 전에는 물렁물렁하고 끈적끈적한 반죽이었다. 밀가루반죽과 식충식물과 성의 마성이 공유하는 끈적끈적하고 물렁물렁한 물질적 속성이, 가령 앞에서 살펴본 <비둘기의 벽화>에서는 도시적 부패의 양상으로서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 그 반죽 상태는 생명의 모태이며 긍정/부정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반죽 상태의 물질적 속성이 더 이상 시각에 의해 포착되지 않고 촉각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비둘기의 벽화>에서와는 달리 ‘나’의 시건의 대상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타자의 시선의 대상도 아니다. ‘나’의 진액과 빗물이 뒤섞이는 것은 ‘나’ 자신의 반죽화를 의미한다. 그 반죽화가 이루어질 때 ‘나’는 타자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를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집에는 <비 분류법>이외에도 반죽의 물질적 속성에 대한 촉각적 포착의 묘사가 적잖이 눈에 띈다. <물뱀> <피서지에서> <죽뻘> 등이 그러하다. 이를 반죽의 상상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반죽의 상상력이야말로 현재 최승호의 시의 전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승호의 시집에서 시선의 시학을 읽어 본 이 글은 아마도 적지 않은 견강부회를 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읽기로부터 이제까지의 최승호 시에 대한 전면적인 다시 읽기의 실마리가 마련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이 글을 쓰게 해주었다. 이 시집에 실린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구절,
시는 흘러가고
독자는 건너가는가
- 노(櫓) 부분
처럼, 필자는 흘러가는 최승호 시를 어느 한 지점에서 건너가본 것이다. <끝>
*채란타이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