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끼를 그대로 두었더니 신발에 물이 들었다
오래된 이끼를 그대로 두었더니 신발에 물이 들었다 (詩54)
허난설헌
인식이 지력을 통해 사물을 뛰어넘어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므로 현상과 이상의 조화 곧 두루 관통하므로 상생한다는
불변의 이치인 앎의 도道를 말하고자 함이 아닌가한다.
유선사 (34)
동해 바닷가에 붉은 뽕나무는 몇번이나 피었을까
조용히 내리는 비처럼 깃털 옷이 닳았기에
잠시 돌아와 보니
동쪽 창가에 있던 나무가 세 줄기나 자라 있었다
그 나무는 진황*과 이별한 후에 심은 나무였다
*스승 이달
유선사 (38)
비단병풍을 펼쳐보니 서쪽으로는 하늘꽃
한 송이 늘어져 있고
남교로 가는 길가에는 한필의 말이 울고 있기에
옥공이 절구공이에 옥구슬을 놓고 소중히 다루듯이
달빛 아래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계수나무
꽃향기를 그려 넣었다
유선사 (29)
한가로운 날 복비께서 붉은색 겨울도포를 마름질하여
생명주 같은 흰 손으로 부지런히 가위질 하시는데
꽃 그림자가 한 낮이라 눈썹도 졸음에 겨워 감겨드니
옥황상제께서 푸른 포도송이를 하사 하셨다
유선사 (41)
신선과 함께 지초밭에 오르다가
잠시 연못에 들러 연밥 따는 것을 배웠다
연꽃에 비추던 햇살이 조금 비껴갈 무렵 꽃잎이 닫히더니
푸른 안개가 자욱히 대라천을 감돌았다
*대라천(大羅天) : 신선이 사는 하늘
유선사 (42)
맑고 밝은 꽃그림자만이 바둑판을 가리워도
한낮의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길 기다리며 천천히 두었다
바둑내기로 이겨서 시냇가에 있는 백룡을 얻어
해질 무렵 등에 타고 하늘연못으로 향하였다
유선사 (44)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 이백이
요경에서 예를 올리니
왕모께서 친히 어울리며 벽성에서 잔치를 베푸셨다
이백이 비단을 펼치며 글을 지으니
얼굴은 취기가 있었으나 역시 청평사를 바칠 때와
다름없이 훌륭한 문장가였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이렇게 논파하였다
-현실세계에 대한 의식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허구의 세계에서 판단하고자 하는 욕망에
희생됨이 없이 부조리에 계속 충실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이백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던 그 시대의 선비들을 은유한 것 같다.
유선사 (45)
옥황상제께서 처음 백옥루를 다스릴 때
둥근 옥으로 만들어진 계단에 오르자
북두칠성 두 번째 별의 기둥주위로 오색구름이 감도니
인자로이 장실을 불러 전서를 쓰게 하여
하늘 문 한 가운데에 우뚝 걸어 놓으셨다
유선사 (46)
부용성 궁궐에 감도는 구름이 비단처럼 아름다운 날
옥황상제께서 화실주인인 만경신선에게 말씀하시기를
해 뜨는 아침에 선녀와 천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얀 난초 꽃더미 속에서 생황을 부는
모습을 그리라 하셨다
유선사 (47)
채소하에게 조서사 내려졌다
벽돌위에 여덟 송이의 꽃과 단사를 섞어서
숯불 담긴 금화로에 올려놓으니 수은이 되었다
그것을 채소하가 백옥반에 담아서 대궐로 향하고 있다
*단사(丹砂) : 선악을 만드는 재료
벽돌은 이미 정형된 지식의 틀이며 꽃과 단사는 심미적 감성의 향기에 재료 즉 앎이 존재할 수 있는 지적능력의 합을 은유하는데 이것은 앎의 성장을 말한다. 고정된 사고의 이기 아래는 뜨거운 생명실존(화로)이 있다. 그 위에는 상생의 아름다움(꽃과 단사)이 있다. 이렇게 생명과 지식과 앎은 수은이 되었다. 이 수은은 쓰임에 따라 악과 독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난설헌은 시대적 반영과도 같은 이 시대에서 균형적인 발전과 상생과 헤겔의 변증법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유선사 (48)
옥청궁의 선녀들 가운데 가장 으뜸인 일은
열흘 동안 왕모를 모시고 선도복숭아도 먹으면서
손보다 더 하얀 붓을 우아하게 들고서
월궁의 하얀 토끼털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란다
유선사 (54)
푸른기와에 난간은 붉게 칠하고 뜨락은 옥구슬로 꾸몄지만
오래된 이끼를 그대로 두었더니 신발에 물이 들었다
조회가 끝나자 신선들이 하례를 올리고 물러나
대궐 안에나 새로 정비한 팔하사를 다스리고 있다
*팔하사(八霞司) : 팔방의 선계를 다스리는 관아
유선사 (55)
차가운 바닷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현포의 저녁 햇살 속에서 꽃구경을 하였다
황금 굴레와 비단 휘장을 두른 붉은 용
이것은 원군이 아니면 결코 탈 수 없으리라
*오쇼는 이렇게 말한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을 찾기 위하여 학자는 도서관으로 신비주의자는 우물로 간다고. 굴레와 고삐 그리고 휘장 이것은 다스림의 도구이다. 시대의 진정한 원군은 이 도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되짚어 보게 하는 부분이다.
유선사(59)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떠오른 달이
일렁이는 물빛에 이슬 맺히듯 퍼지니
마치 일만 궁녀가 푸른 난새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라
날이 밝아 요지에서 열리는 잔치에 달려가니
한가락 행황소리가 푸른 하늘을 가르고 있다
* 달이 수많은 강에 비쳐져 그 모습을 나누건만 달은 하나이듯 진리는 천지자연에 고루 미친다 하였던가. 인간도 번뇌의 파도를 잠재우면 이 진리가 자신의 마음에 달빛이 비치 듯 선명하게 비침이니 인간은 곧 하나하나가 해인海印이 찍힌 화엄의 실체라. 하니 우주만물 생성변화의 이치를 담은 큰 그릇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유선사 (61)
열 겹으로 둘러싸인 십중성에서 조회 때 녹장을 아뢰고
숭산에 있는 시냇물에서 사슴에게
물을 먹이는 숙경을 찾았다
때마침 자미궁에서 연회가 끝난 신선들이
학을 타고 날아오르니
구천에서 청아하게 울리는 옥패물 소리가
달 속에서도 환히 들릴 것만 같다
* 녹장(綠章) : 도교에서 천제인 옥황상제에게 기도할 때 파란 종이에 붉은 글씨로 쓴 것을 말한다.
타이핑 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