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수<추전역>외 1편
추전역 / 정연수
희망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자리했다
우리나라 제일 높은
해발 855m 추전역
서민의 애환 덜컹이는 태백선 완행열차
그 화력 좋던 석탄 다 실어 보내고
가슴 비운 사람끼리 꿈을 안고 찾아드는
태백의 관문
일상에 지친 삶의 아픔도
구름 벗한 높이쯤 다다르면
어느새 길고 긴 정암 터널 빠져 나온
환한 세상
저 아래 발원지에서 흐르는 한강 낙동강
팔도의 애환 굽어보는
싸리밭 가득한 우리의 희망은
해발 855m
규폐병동에서 2 / 정연수
울 아버지 붕락사고로 막장에 갇혀
밖에 있는 가족 걱정 이틀 밤낮 사경 해맬 때
강씨도 덩달아 퇴갱을 안 했다
들여다주는 도시락 먹으며 갑 을 병방
꺼내야 돼 살려야 돼
씨름판에서 소 타던 힘으로 삽질을 해댔다
아버지가 갱구 밖을 나왔을 땐
아득한 아버지 숨만큼 강씨도 탈진했다
술만 거나해지면 아버지는 날 앉혀놓고
강씨는 우리 집안 은인이야
날 살리려고 같이 죽어갈 뻔했다
니 평생 잊으면 그거도 불효다 이놈아 알겠지
강씨가 규폐병동에 입원한 지 삼 년이 못 돼
영안실로 옮겼다는 전화를 내가 받았다
아버지는 그럴 리 없다며 규폐병동으로 달려갔고
강씨가 누워 있던 침대 머리맡엔
반쯤 남은 링겔병만 대롱대롱 걸렸다
아버지는 당신보다 먼저 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소주 서너 병을 비우고도 연신 강씨 얘기다
칠월의 오후보다 더 뜨겁던
해저(海底) 아득한 막장에서의 삽질 곡괭이질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은 있는 법이다
실연 혹은 첫 경험 같은
강씨 생각이 더욱 선한가 보다
그때 내가 먼저 갔어야 되는데, 내가 먼저 갔어야
강씨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도 되는 양
아버지의 목쉰 울음 안개비처럼 서럽더니
은혜 갚을 일이 막연해진 게 원통해선지
하늘도 덩달아 비를 잔뜩 뿌렸다.
정연수 교수 (탄전문화연구소장)는 탄광촌 고유의 문화, 탄광노동자의 삶과 애환,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을 담은
'탄광촌 풍속 이야기'(북코리아)를 펴냈다. 현재, 강릉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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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에 건네받았던 한중대역시집<시의 소통, 경계를 넘어선 만남>가운데, 특별히 정연수 시인의 추전역을 주의 깊게 읽은 건, 추전역 가기전 도계역 어디쯤에서 20대 시절 경험한 스위치백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독서지도 교수였단 점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철모르고 외웠던 간이역 이름들과 들꽃들, 잃어버린 청춘의 한 조각을 부상시켜준 가로등 같은 시. 추전역.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더 그리워지는 내 歷史의 간이역 같은 시.
진폐증을 다룬 광산 노동시들의 특징은 이야기시라는 점이다. 시를 읽으면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미적 성취를 획득하는 길이란 느낌도 든다. 그 예로 뭉크(Edvard Munch)의「절규」를 들 수 있겠다. 그림 속 인물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없어 해골 같기도 하고 태아 같기도 한 그림. 그렇지만 그 표정을 한번 보게 되면 다시 보게 되고, 종국에는 미적인 즐거움까지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광부들의 절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정 교수와 같은 이들을 통해 더 오래 더 선명히 재조명될 것이 분명하다.
문득, 그의 행보와 안부가 궁금해지는 날이다. 실로 혼령이 되서도 은혜를 갚는다는‘결초보은(結草報恩)’의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고통과 한숨을 기억하는 일 또한 산 자의 최선의 예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
20110704-201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