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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라몬 히메네스<야상곡>외 5편

미송 2011. 11. 30. 21:35

 

야상곡

 

땅 위의 길은 땅 위에 있지만

바다여

그대의 길은

하늘 위에 있다

 

금과 은으로 아로새긴

별들이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땅은

육체가 가는 길

바다는

영혼이 가는 길

 

영혼은 바다에

고독을 끌어들이는 나그네

 

육체는 영원과 이별하고

바닷가에 홀로

컴컴하고 싸늘하게 누워 있다

 

- 주검처럼!

흡사하구나

바다에로의 떠남과

죽음과

영원한 생명은 -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이런 모습을 한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볼 수 없지만 내 곁에 함께 있는 이

때때로 내가 만나려고 애를 쓰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잊고 지내는 이

 

내가 말할 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이

내가 미워할 때 선한 마음으로 용서하는 이

 

내가 집안에 있을 때면 산책을 가는 이

내가 죽었을 때 내 곁에 서서 남아 있을 이

 

그가 바로 나이다.

 

 

 

가을의 서곡

 

창을 열고 너를 기대한다 가을

어서 와서 나의 귀밑머리를 날려다오

어딘지 모를 길가에 핀 장미의

나를 흥분시키는 이 신비한 향기

일찍 찾아 온 시간이 벌써 달그림자에 숨었다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이 저 아득한 길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나니

가슴 속 긴장한 심장 소리

생명은 그렇게 요원하다 아름다운 풍경

레이스와 거품을 만들어낸다

저쪽의 조용한 나뭇잎 깊은 곳

즐거운 노랫소리

서로 엉키어 있다

부드러운 마음이 불안한 듯 서성인다

흙 속에서 나오는

활기찬 새롭고 신선한 숨결 가을, 내가 갈망하나니,

어서 와서 나의 귀밑머리를 쓰다듬어다오.

 

 

 

고독

 

너의 안에 모든 네가 있다.

바다여,

그러나 네게는 참 네가 없다

얼마나 홀로

얼마나 멀리

항상 너 자신에게서 떨어져 있는가

수천의 생채기로 순간 순간 열리는

나의 이마 같은

너의 파도는 나의 사념처럼 떠간다

가고 또 오고

입맞추고 또 떨어지고

그 영원한 만남의 몸짓

바다여, 그 끝없는 잊혀짐의 몸짓

너는 너다.

그러나 너는 그걸 모른다

너의 심장이 네게서 뛴다

그러나 너는 느끼지 못한다

이 고독한 충만, 고독의 바다여!

 

 

 

시인

 

내가 이 책을 들면

갑자기 가슴이 깨끗해온다

수정빛 자몽처럼

 

―내 정신에 빛이 든다

그 빛은 새벽 참새소리로 밝아온다

나는 아무 햇살도 보지 못하지만―

 

나는 너무 기분이 좋다 어린아이처럼

삶의 보물을 하나도 써보지 못한 아이처럼,

아직 백합의 모든 것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죽음은 항상 이웃들에게나 있는 것―

모든 것은 햇살이다 : 영광, 무지개, 사랑, 일요일.

 

 

 

구원(久遠)의 길

 

오후의 길들은 밤이 되면 하나가 된다

그하나의 길로 나는 네게로 가야만 되리

몸을 끝끝내 나타내지 않는 사랑하는 너에게

산의 불빛처럼 바다의 미풍처럼 그 하나의 길로

나는 네게로 가야만 되리

 

처음에 그녀는 순결한 몸으로 왔다

결백의 의상을 하고―― 나는 소년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후에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무슨 의상이었는지 나는 모르지 나도 모르게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여왕이 되었다

보석으로 찬란함을 떨치며 나는 쓴 분노를 무감각하게 내뱉았다

그러나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고 나는 미소를 흘려 보냈다

예전의 그 결백한 가운을 걸쳤을 때 나는 다시 그녀를 믿었다

가운도 벗어 버렸고…… 완전히 나신(裸身)으로 나타났다

 

오, 나의 생명의 정열, 나시(裸詩)의 정(精)이여!

그대 영원히 나의 것이리

나는 돌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바람으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파도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불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인간으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후안 라몬 히메네스 (Juan Ramon Jimenez)

1881∼1958. 스페인의 시인.

 

195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1900년 시인 루벤 다리오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제비꽃의 영혼 Almas de violeta〉·〈수련 Ninfeas〉 등 그의 초기 시집 2권이 출간되었다. 보라색과 녹색으로 인쇄된 이 2권의 시집은 너무나 감상적이어서, 말년에 크게 당혹한 히메네스는 인쇄본을 닥치는 대로 없애버렸다. 체력이 약했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마드리드를 떠났는데, 〈목가시 Pastorales〉(1911)·〈머나먼 정원 Jardines lejanos〉(1905)·〈순수한 엘레지 Elegias puras〉(1908) 등 이 시기에 출판된 시집들은 자유시로 개성과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다리오의 영향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1912년 마드리드로 돌아와, 그후 4년 동안 레시덴시아데에스투디안테스에 거주했으며 이 교육기관에서 발행되는 간행물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1916년 뉴욕 시를 여행했고 힌두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제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와 그곳에서 결혼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 Diario de un poeta reciencasado〉(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 Diario de un poeta y mar〉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la poesia desnuda)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 ∼ 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주로 시인으로 유명하나,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과 그의 당나귀에 관한 산문인 〈플라테로와 나 Platero y yo〉(1917)가 번역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바다로 간 기수 Riders to the Sea〉(1920)를 함께 번역했다. 일생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영혼의 소네트 1914∼15 Sonetos espirituales 1914∼15〉(1916)·〈돌과 하늘 Piedra y cielo〉(1919)·〈운문시 1917∼23 Poesia, en verso 1917∼23〉(1923)·〈산문과 운문으로 된 시 Poesia en prosa y verso〉(1932)·〈나의 노랫소리 Voces de mi copla〉(1945)·〈막다른 길의 동물 Animal de fondo〉(194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