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 소로우의 시적 삶과 삶의 시적 기록
소로우는 그의 스승격인 에머슨에 의해 그의 시재(詩才)가 인정되었다. 에머슨은 그의 논문<시인>에서 제시한 시인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시인을 찾고 있었는데, 그는 소로우의 초기 시에서 그의 이러한 이상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은 에머슨이 영국의 칼라일에게 쓴 편지에서 소로우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읽을 수 있다.
에머슨은 소로우의 시를 "이처럼 비시적(非詩的)인 미국의 숲에서 울려 퍼져 나온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상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머슨의 소로우의 시에 대한 이 같은 극찬은 수정돼야 했다. 왜냐하면 소로우의 시는 에머슨이 기대하던 만큼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머슨은 소로우의 시에서 단지 시적인 기교 이상을 봤다.
에머슨은 소로우의 시가 "시의 유려함이나 기교면에서는 모자라지만 그의 영적인 인식능력에 그의 시의 근원이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의 평자들도 에머슨의 이 같은 판단에 거의 동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가 쓴 최상의 시는 그의 [윌든 Walden](1854)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시적 삶과 삶의 시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의 최상의 시가 아직도 씌여지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제목이 붙지 않은 한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일생은 내가 쓰기를 원했던 시였다.
그러나 나는 삶을 살면서 [이것을] 시로 동시에 쓸 수 없다.
소로우에게는 두 가지의 측면이 그의 삶의 축이었다. 그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 관한 그의 신념이었다. 이 둘은 그에게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서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된다. [중략]
사회의 부정과 인간성의 말살을 그가 좌시(座視)지 못했던 것은 그러므로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의 발로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하는 지성이었으며, "진정한 양키-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삶을 아껴 살고, 소박하게 삶으로써 시간과 정력을 아끼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삶의 진수를 깊이 음미하여 이를 빨아 마시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월든 숲에 가서 살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숲으로 간 이유는 삶을 곱씹어 찬찬히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의 근원적인 사실만을 접하면서 삶이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질박하라, 질박하라, 질박하라! 너의 걱정거리를 두세 가지만으로 제한시켜라. 백 개나 천 개의 걱정거리를 왜 가지려 하느냐. (Walden, p.61)
그러나 소로우가 월든 숲으로 가서 살기로 결심한 가장 절박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조용히 살고 있다" 라는 그의 인식에 기초한다. 이러한 절망을 물질적인 소유를 위해 일만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을 가져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특징"이라고 믿는다. 이는 곧 자연과의 친교를 다시 회복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일이다. [중략]
소로우는 말장난(pun)을 좋아했으며,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원에 흥미를 느꼈다. 다음과 같은 예가 이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요새 철학 교수는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치밀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의 학파를 세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혜를 지극히 사랑하여 지혜가 가르치는 대로 소박하고 독립적으로 포용성을 갖고 신뢰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Walden, p. 9) [중략]
그는 역설을 사용하여 허(虛)를 찌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기차 위에 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차가 우리들 위를 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환경과 생태계를 무시한 개발의 위험성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이정호<영미시의 포스트모던적 읽기: 베오울프에서 T.S. 엘리엇까지> 중에서
행복한 삶이란
나 이외의 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식어 버린 불꽃이나 어둠 속에 응고된 돌멩이가 아니다
별을 별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발에 채인 돌멩이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행복은 시작 된다
사소한 행복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하루 한 시간의 행복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떠하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 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의 중요한 이유로 숲을 떠났다
내 앞에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삶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래서 숲에서의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정해진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해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숲 속에 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안돼
내 오두막 문간에서 호수까지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먼지투성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또 얼마나 깊이 패였겠는가
자연은 성실하고 믿음이 가는 몇 안되는 영혼의 편이다
자연이 그런 영혼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인가와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서 홀로 사는 이를 보러 간다
뜰에는 그의 양식이 될 딸기와 토마토가 자라고
산기슭에서는 햇빛이 즐거이 몸을 기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신들의 공평무사한 자비를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저마다 걷다보면 좋은 길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부주의해서
또는 어리석은 나머지 좋지 못한 길을 선택하고 만다
분명 세상에는 우리가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꼭 걸어 보았으면 하고 바라는 오솔길처럼
이상적인 내면 세계의 어떤 길이 존재한다.
만일 분명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높은 목적지로 향하는 수단이라면
어떤 일이든 하찮거나 지겨울 이유가 무엇일까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딛고 올라갈 사다리
우리의 존재가 탈바꿈 될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구도자의 편지" 中
20111201-2021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