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행숙<소란과 고요>

미송 2011. 12. 10. 16:46

 

 

 

소란과 고요 / 김행숙

 

 

년 동안 바람이 불었고, 그리고, 바람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가지 않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바람

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온 것들이 다시 바람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가곤 했다.

 

마을의 돼지 떼가 날아가버린 대낮에 나는 돼지보

다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요한 밤이 연기처럼

찾아왔을 때 나는 슬프다는 것을 알았다. 돼지야, 돼

지야, 이제 나는 뭘 믿고 사니? 나는 뭘 먹고 사니?

 

나는 백 년 만에 빗자루를 잡았다.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대지. 좋은 일이야. 깨끗이 마당을 

쓸고, 그리고, 오랫동안 늙은 망령이 빗자루를 잡고

서 있었다. 또 벌써 지저분해졌잖아,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분개해서 빗자루를 뺏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빗자루

를 잡고 서 있었다. 나는 비바람처럼 비질을 하면서

너무나 감미롭게 싸악, 이라고 발음을 했다. 벼이삭

이 쓰러지고,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배나무에

서 떨어진 배가 향기를 피워올리며 썩기 전에 먼저

데구르르 상처를 내면서 쓸려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날아오는 것들이 많았다. 푸른 먼지 위

에 붉은 먼지와,

 

그리고, 나는 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나는 계속해

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때로 주체할 수 없이 힘

이 솟구치는 날이 있었다.

 

-시집<이별의 능력> (문학과 지성사 2007) 

 

 

어린 시절 그러니 대 여섯 살 적이었을까 아니, 백 년 전 어느 날이었을까, 지루한 장마 끝에 가끔 보았던 장면이네. 추억 속에선 급류에 떠내려가는 돼지들,  시詩 속에선 바람에 날아가는 돼지들. 그 돼지가 그 돼지... 라고 말하면 과연...말이 될까? 어쨌든, 오늘의 화자는 돼지 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네. 나도 그렇네. 강풍에도 날아가지 않았다니, 저걸 어째 혀만 차기에는 분위기가 왠지 재밌고 꿋꿋해 보여서, 오히려 괜찮냐고 한번 쯤 물어봐야 할 것도 같네. 물론 꿈틀거리는 시어에 끌려 지절대는 혼잣말이지만. 아무튼, 세상에 나 보다 더한 여장부가 있구나! 감탄하네(믿거나 말거나). 소란에 함몰되지 않는 고요한 역설이 재치스럽네. 시간의 공간화를 싫어했던 베르그송의 사유가 불멸의 이름과 함께 내 안에서도 솟구치네. 더 이상 시계가 필요없는 곳에선 적멸보궁이 따로 없겠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