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판화=정길재〉
《나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인생이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을, 영혼도 없이 파괴된 한 남자, 이제는 거의 유령이 되어버린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내 젊음을 희생시켜버렸다는 것을 잊고 있었지.》
다니엘은 누리아의 긴 편지를 읽고 난 후 훌리안의 마지막 책이었던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부탁했다.
“다니엘, 너는 날 떠나보내지 마, 비록 한 귀퉁이에 숨겨서라도. 언제까지나 나를 기억해주렴.”
-<바람의 그림자>중에서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 져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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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농담이야.”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네가 아직 보지 못한 이 도시의 얼굴을 보여주려는 약속 때문이었어.
적어도 이렇게 되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기억할, 아니면 바르셀로나를 기억할 모티프 하나는 갖게 될 테니까.”
베아는 좀 슬프게 미소 지었고 내 시선을 피했다.
“이제 막 극장에 가려는 참이었어, 알겠어? 오늘 너를 안 보려고 말야.” 그녀가 말했다.
“왜?”베아는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들었다. 마치 공중으로 달아나버리는 단어들을 사냥하겠다는 듯이.
“어쩜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를까 봐, 그게 두려워서.”
그녀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낯선 이들을 연결해주는 낙심의 침묵과 석양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뭐든지 말해야 된다고 느꼈다. 비록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그를 사랑해? 아니면, 아냐?”
그녀는 입술 끝에서 흩어져버리는 미소를 내게 선사했다.
“네가 알 바가 아냐.”
“그렇지.” 내가 말했다. “그건 단지 네 일이지.”
그녀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런데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네가 알 바가 아냐.”
내가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파블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알아. 우리 식구들과…….”
“하지만 난 거의 남이야.” 내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너한테서 그 말을 듣고 싶어.”
“무슨 말을?”
“진정으로 그를 좋아한다는 말. 집을 떠나기 위해, 아니면 바르셀로나와 네 가족들에게서 멀리 떠나
아무도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곳으로 가기 위해 그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말.
너는 떠나가는 거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녀의 두 눈이 분노에 찬 눈물로 반짝였다.
“너는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다니엘. 넌 나를 몰라.”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해봐. 그럼 가줄게. 그를 사랑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긴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녀가 결국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넌 나만 봐야 돼. 나중에는 이런 저런 것들 볼 게 많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만. 뭐, 그런 식의 대사를 제가 좀 좋아하는 편이죠. 언젠가 친구의 아들이 유치원에서 좋아하는 여자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는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골치덩어리네. 아무 생각이 없군.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말했죠.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끔씩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인생을 바칠 결심도 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된 건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 덕분이에요. 좋다는 느낌이 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중에는 이런 저런 것들 생각할 게 많아질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냥.
2008 문학집배원 김연수
중남미 작가들을 내 블로그 안에서 재검색하다가, 2년전 여름쯤에 스크랩해 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을 만났다. 발음도 이름도 낯설다. 그의 책 '바람의 그림자' 란 제목이 꽤 멋지다. 그렇지만 책을 직접 읽지 않고선 그리 쉽게 해석될 문장들은 아닌 것 같다. 그저 感으로, 중남미 다른 작가들에 대한 느낌의 기억으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몇개의 문장과 우연히 눈에 띈 시(책 제목과 같은 詩題)를 저장해 둔다. 시에 대한 감상은 맘속으로만 일단 정리하고... 또, 다른 각도로 변형시켜 감상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메모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