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 2005) 중에서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 2005) 중에서
이상한 시공간의 원심력과 구심력
진공관 속에서 나비 한마리 날아간다 지직거리면서
폭설로 뒤덮인 언덕 너머로부터 노래가 흘러나온다
전봇대 한그루 문득 걸음을 멈추고 등을 수그렸다
이 세계에 맞춰진 주파수는 없다
애창곡은 여전히 미완성인 체로 불어오다 만다
유리창 밖에선 태양이 빛났지만
세상의 단 한 군데쯤에선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을 수 있다
전원을 끈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눈을 뜨며
어느 요절한 가수가 노래를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윤의섭<진공관 램프를 틀었네> (현대시학. 2004년 1월호)부분
윤희섭의 어떤 시들은, 어쩌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에서 이탈하여, 흐르지 않는 시간이라는 신화적 시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시간은 '영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풍경들 안에서 보자면, 그의 자리는 특이한 것 같다. 그는 미시적 일상에 대한 관찰력에 기대지도 않고, 1인칭의 감성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도 않으며, 우리 시대의 속성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지극히 의식적으로, 신화적이라고 할 만한 다른 세계,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의식 속에 부장된 흔하지만, 요컨대 그처럼 탈일상적인 방식으로, 요컨대 미시 관찰에서 출발하지 않고, 요컨대 정공법으로 그곳에 닿으려는 시인은, 대단히 드물다. 그래서 "세상의 단 한 군데쯤엔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구절은 특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말이 지워진 곳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를 그대로 말하되,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시들이 있다. 이것은 압축이나 절제 같은 일반적 미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특히 이미지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한 이 시들은, 시의 비밀이 시인의 의지나 발언에 있지 않고 다만 '시선의 각도'에 있다고 믿는다. 대표적으로 오규원(吳圭原)의 시들에서 그런 경향을 볼 수 있지만, 다음의 시에 대해서까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 죽음을 불쑥 전화로 내게 안기네
창밖에 띄엄띄엄 보이는 눈송이를 따라 내리다가
내리다가 돌에 얹혔다가 허물어졌다가 마른풀에 얹혔다가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흙에 얹혔다가 스며들다가
물끄러미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내 손을 보네
-오규원<눈송이와 전화>(현대시학, 2004년 1월호) 전문
오규원의 <눈송이와 전화>는 소품이지만, 그의 시가 지닌 냉정하고 중성적인 이미지에도 이렇게 모종의 떨림 같은 것이 개입할 수 있다니,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건조한 그의 모든 이미지들이 이런 떨림을 내장하고 있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어쩐지 그의 시들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부음의 느낌을 눈송이의 이동으로 치환하는 특유의 그 가벼운 전이 안에서, 이제 먼 길을 돌아 어떤 관념도 틈입할 수 없이 허허로운 지경에 이른 한 시인의 자재(自在)로움을 만난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진은영<멜랑콜리아>(현대시, 2004, 1월호) 전문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매력적이다.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을 전혀 멜랑꼴리하지 않게 소화해내는 이 발랄함의 이면은, 그러나 단순하지 않다. 이 시의 '아이스크림'에는 사랑의 신화에 대한 현대적 조롱이라고 정리해버릴 수만은 없는, 미묘한 '슬픔'이 틈입해 있다. 멜랑꼴리를 천재들의 속성으로 규정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다. 특출한 완벽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는 우울에 시달리게 마련이지만, 맥락을 더 넓혀보면, 이 멜랑꼴리 안에는 대상의 근원적 모호성과 규정 불가능함에 괴로워하는 자 특유의 감각이 들어 있다. 멜랑꼴리의 시선으로 보면, 세계뿐만 아니라 타자 역시 우울의 기원, 혹은 '증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생각 사이를 비집고 출몰하는 거대한 질병, 혹은 불가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저 모래사막에 그려진 물고기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장미의 화원
지겨울 만큼 많이 언급되어온 것이지만, 지금 '시'라는 장르가 처한 상황은 역설적이다. 요약하면 대개 이렇다. 문화의 머나먼 변방인데도, 이 변방의 거류민들은 넘쳐난다. 아무도 읽지 않지만, 누구나 쓴다. 이런 상황은 확실히 좀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아마 두 가지 인식이 가능할 것 같다. 하나는 '예언자'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동호인'으로서의 시인을 긍정하는 것이다. 동호회로서의 '시단'은 나쁜 것인가? '시의 위의(威儀)'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시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19세기적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장미들, 천변만화하는 장미들을 키우는 시의 화원은, 이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저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정신적 잠수함'의 토끼 노릇을 해내는 것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이다. 변방의 세계는 이미지와 서사와 규모와 집단작업이 장악한 저 중원의 세계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포터블하고, 더 이동가능하며, 그래서 더 첨예해질 수 있다. 시가 쉬워지면 대중이 시를 읽을 것이라는 추측은 착각이다. 문제는 장르의 '매력'이지 '난해함'이나 '쉬움'이 아니다. 덧붙여야 할 각주가 많은 말이지만, 역설적으로 시는 더 '전문화'되어야 한다. 이건 '프로페셔널한 동호인'이라는 이상한 모순어법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풍으로 말하면 '시의 오타쿠' 같은 것도 괜찮지 않은가. 지극히 탈사회적이며 탈권위적인 방식으로, 그저 제가 하는 짓에 한없이 민감한 자 말이다.
오타쿠オタク;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면서 취미생활을 넘어선 준전문가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지칭한다.
특정 분야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 105~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