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병률<겹>

미송 2012. 2. 25. 11:28

    / 이병률

     

     

    나에겐 쉰이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

    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

    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며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 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참, 시원찮은 형(兄)이다. 그럼에도 시 안에서 또는 화자(話者)의 연민 속에서 형은 잠간일지라도 체온을 느끼다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감성과 서사와 서정을 품은 <겹>이란 시를 읽자니, 시인들은 밥을 먹다 후- 한숨을 내 쉴 것 같고, 소설가들은 그저 통속적인 삶의 한 이력이라며 간단하게 또 장황하게 정리할 것 같다. 전생에 서로 빚을 많이 졌었나 보네, 빚 갚을 돈이 없어서 아주 떠났겠지... 그 나머지는 구설수와 기타 등등. 분명 시詩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낼 것도 같고 그리고... 화자의 따뜻한 바람望을 보고 있는 독자는 시원찮은 말이라도 자꾸만 하고 싶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아주 가 버린 형의 변명을 대신 적어야 할 것도 같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