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사이버 공간과 전통의 새로운 만남]
세상을 등진 친구를 보려고 강원도 오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새끼 곰을 한 마리 잡아 같이 산다고 했습니다. 그 곰을 시켜 심부름도 시킨다고 했습니다. 밥도 짓고 숭늉도 끓인다는 것인데 정말인가 싶어 호기심도 동했습니다. 오대산 쪽에서 산길을 십 리쯤 걸어서 들어갔습니다. 친구는 쬐그만 암자 비슷한 데서 장작불을 때며 살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하면서 들어서는데 울타리 비슷한 문 근처에 누군가 서 있어 자세히 보았더니 곰이었습니다. 일본 여자처럼 손을 모아잡고 있는 겁니다. 너무 놀라 달아날 궁리부터 하다 친구가 히죽대며 웃고 있어 별수 없이 곰의 안내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 곰을 길들인 방법을 물었더니, 작은 막대기를 주워오도록 길들이는 데 꼬박 이 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개를 훈련시킬 때처럼 온갖 방법을 다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비결을 알아냈던 거지요. 심부름까지 하게 된 것도 그 비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막대기를 주워오고 싶다는 마음을 지니고 간절하게 소원해야 곰도 그것을 전달받는다는 것이 그 비결이었습니다. 결론은 애정이었어요. 진정한 애정을 기울여야 야생 동물도 그걸 이해하더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발전해 곰이 빨래도 하고 우물물도 긷고 심지어 동네로 내려가 막걸리도 받아오고 편지까지 부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곰이 끓였는지 아니면 친구가 은근슬쩍 속였는지 모르지만 구수란 숭늉도 얻어마시고 하면서 며칠을 잘 놀다 돌아왔는데, 그 뒤 친구한테서 좋지 않은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곰이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사연을 듣고 본즉 그해 선거에 그 곰이 대신 투표를 하고 왔던 것입니다. 곰은 주인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보다 제 마음속에 있던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고 그게 괴로웠던 나머지 숲속으로 달아나버렸던 것입니다.
허풍을 떨어서 미안합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내가 썼던 콩트의 내용입니다. 학교 강단이든 무슨 그런 자리 같은 데 설 기회가 생기면 주눅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도 나는 이 얘기를 한번쯤 하고 넘어갑니다. 이게 뭐냐면 40여 년을 소설 얽는 일에 매달려온 나 자신에 대한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그 동안 괴발개발 떠들어온 모든 것이 이 짧고 엉터리 같은 얘기에 집약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을 말하는 얘깁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의 한평생이 모두 거기 투자되어왔다고 하면 과언일까요.
이삼 년 사이에 또 다른 징후들이 주위를 에워싸는 듯이 느껴집니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개념이 그것인데 이것도 심상치 않습니다. 싫든 좋든 그것을 인정하고 절감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만 얼마 전까지도 그런 데 몰두하는 젊은 세대들을 실은 우습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컴퓨터 앞에 한동안 앉아보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딛고 살아오면서 삶이라고 생각했던 흙의 감촉이라든지 구체적으로 만지고 느끼던 그런 현실적 삶 외에도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각성이 그것이겠지요. 이걸 어떻게 현실의 세계와 연결하고 길들여야 할지가 문제이지 무턱대고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흙냄새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만큼의 십분의 일 정도나 절감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도 이런 곤혹감과 연루가 됩니다. 예삿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전혀 근거 없는 공간에 뭐가 있다고 헤매느냐고 젊은 세대들을 탓하고 있을 것입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내 눈으로 봐도 이건 도대체 짜깁기 날탕 영화예요. 쿵후에서도 따오고 SF에서도 따오고 전자게임에서도 따와 온갖 자극적인 요소들로만 내용이 꿰매지다시피 한 누더기 필름이지요. 처음 나도 이 영화를 코웃음치고 굉장히 경멸했습니다. 여태 알아왔던 영화 패턴이나 평가기준에서도 너무 동떨어져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학생들과 두어 번 보는 동안에 뭔가 다른 게 있어서 젊은 세대들을 그렇게 맹목적으로 흡수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웬만큼 보아줄 만한 영화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한마디로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양상이 있다는 거지요. 탄두 궤도까지 생생하게 영상으로 보여주는 그런 테크놀로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따위 누더기 짜깁기 필름이 뭔가 새로운 양상과 예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보석 같은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나는 고독하다, 내 고독을 당신들은 왜 몰라주느냐 하는 그런 패턴의 일방적 주장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시와 소설, 여태까지 문학의 가장 주된 주장과 주제는 그것이었고 앞으로 당분간도 여전히 그렇겠지요. 그렇게 징징 우는 작품들을 너무 많이 너무 흔하게 대하다보니 감성까지 면역이 되어버렸는지 이젠 이런저런 신세타령 문학에 혐오감마저 입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를 하는 시, 내 주장이 아니라 남의 사정을 말하는 소설이 그나마 읽히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이제하 [사이버 공간과 전통의 새로운 만남] 일부.
나의 문학이야기<2001,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