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맹세한다 너를…… 찾/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가늘어져 흔들린다
말이 필요없는 건 사랑뿐이라는
참 舊式 같은 비
마음을 띄어쓰지 않은
사람들이 쉼표도 없이 흔들린다
죽은 듯이 흔들린다
ㅡ이창기,「비」,『꿈에도 별은 찬밥처럼』(문학과지성사) 1989
이따금 하늘 어두우니 오늘은 툭툭 창가를 때리며 구식 같은 봄비가 왔음 합니다. 어쩐지 '구식'이란 도드라진 한자가 도리어 새롭습니다. 벌써 달의 중순이 지나갑니다. 우편물을 받은 지 말입니다. 새해 들어 처음으로 독자에게 받은 선물은 우편으로 도착했습니다. 2012년 2월 14일에 부친 익일특급우편에는 2190즉납 인쇄가 찍혀있습니다. 고양(화성와우편취급국 등기라 적혀있습니다)에서 날아온 택배인데 과테말라 안티구아산 볶은 원두입니다. 중앙아메리카 북서단에 있는 나라라니.
상상이 쉽게 되진 않습니다. 일점 태양만이 찬란타가 밤엔 별빛 한없이 높은 나라일 것 같기도 하고, 산짐승이 여태도록 슬피 우는 산맥의 나라일 것 같기도 하고요. 언제일지 모르지만 기회 날 때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단 생각 쪽으로 우선 밀쳐두고, 생기 넘친 빛깔을 뽐내는 커피콩을 밀폐용기에서 꺼내 씹습니다. 보내준 분은 분쇄기가 있다 짐작해 보냈을 테지만(또 분쇄해주는 곳이 어딘지 알려준 이도 있지만) 전 분쇄기도 없고요. 꺼끌꺼끌한 것이 잇새에 끼고 씁쓰레하게 퍼지는 맛의 파급력,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 책을 읽다 입속에 털어 넣어 꼭 다문 채 먹습니다. 찬장이 아닌 책장 앞에 두었습니다. 익일특급으로 부친 마음이 읽혀 소홀히 대하기엔 석연찮아서 말입니다.
…시를 세부적으로 권해야 하지만 나름의 계획,일정에서 벗어나도 오늘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키 위해 소설을 더 상세히 적습니다.
애니 프루의『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이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입니다. 둘 다를 권해주고 싶네요. 영상으로 느끼는 팔월 로키산맥의 절경(영화 촬영지와 소설의 공간은 다른 곳이므로), 석녹색 휘도는 들판과 물빛, 상처받는 배역에 몸을 내맡긴 배우들이 특히 아름답지만 소설 활자로 표현되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이라는 장소, 트리밍 한 듯 군더더기 없고 단단한 문체, 써늘하게 가슴 울리는 인물의 심리묘사도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퀴어 영화Queer Cinema나 게이 이야기라는 것에 먼저 편견을 가지지는 말길. 그거 하나만 부탁드리고 소개로 들어간다면, 여성소설가가 그려내는 동성 간의 사랑(극한의 아찔한 사랑을 보편적인 것으로 감싸 안는 역량에 대하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란 걸 알려드립니다.
간략하게는 20년간 지속되는 두 남자의 사랑이야깁니다. 갓 스물이 되기 전, 여름 방목 철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부터 시작되는 잭(제이크 질레할)과 에니스(히스 레저)의 러브스토리. 둘은 극구 호모란 명칭을 꺼리고, 서로의 감정을 숨기고, 기약도 없이 현실적 사회의 일원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게지요. 딱한 노릇으로 고된 시간을 하릴없이 견디다 사년이 지나 해후를 합니다. 소설 초입부터 둘 간의 대사 행동 말투에서 성격이 묻어나 저돌적이고 정열적인 잭과 신중하고 조심성 있는 에니스의 사랑이 왠지 이뤄지지 않겠구나, 라는 짐작에 가슴이 먼저 먹먹해집니다. 가령 이절 구절입니다.
일기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에니스는 이런 날이면 나타나는 뜨거운 뭉게구름이 오지 않는지 서쪽을 보았지만 잭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랑이 너무 깊어 올려다보면 빠져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글: 애니 프루,「브로크백 마운틴」중 발췌 (MEDIA2.0) 2006)
같은 하늘의 일기를 감지하는 둘의 차이가 이 같이 갈린다니 퍽 흥미롭고 애달프지 않나, 싶네요. 당연히 잭은 사랑에 빠져죽고 싶었을 겁니다. 에니스는요,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비난과 경멸, 모욕과 손해를 생각하고 현실을 놓지 못했을 겁니다. ……. 맞습니다. 제 짐작대로, 몇 년 만의 만남은 성에 안찬다며 함께 목장일을 하며 살자 잭은 요구합니다. 그도 그 못지않게 간절했지만, 에니스의 선택은 거절입니다. 그리고 에니스는 어느 날 수취인사망이라는 엽서로 잭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남겨진 것은 사랑하는 그(잭)의 집을 찾아가서 보게 된 두 겹 셔츠. 청데님과 체크무늬 셔츠입니다.
위쪽 끝으로 벽에 조금 들어간 틈이 있어 비밀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여기, 셔츠, 한 장이 못에 길게 걸려 있었다. 그는 셔츠를 못에서 내렸다. 브로크백 시절 잭의 낡은 셔츠였다. 소매에 달라붙은 피는 마지막 날 오후 산에서 서로 오해하여 벌어진 드잡이와 몸싸움에서 잭이 무릎으로 에니스의 코를 세게 쳤을 때 흘러나왔던, 바로 에니스 자신의 피였다. (…) 셔츠가 어쩐지 묵직했다. 그때 에니스는 잭의 셔츠 안에 셔츠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았다. 잭의 소매 안에 조심스레 끼워져 있던 또 다른 소매는 에니스의 체크무늬 셔츠였다. 오래전에 빌어먹을 어느 세탁소에서 잃어버렸겠거니 생각했던, 주머니는 뜯겨나가고 단추는 떨어진 더러운 셔츠. 잭의 셔츠와 그가 몰래 가져가 여기 그 셔츠 안에 숨겨둔 에니스의 셔츠가 두 겹의 피부처럼 한 쌍으로, 한 셔츠가 다른 셔츠 속에 안긴 채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윗글과 영화에서 제가 가진 감정은 놓쳐버린 사랑입니다. 쉽게 가르치고 단죄하고 주장하지만 정작 실천에 돌입하며 결과라는 획득물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이는 제 짧은 생애지만 본적이 드뭅니다. 상당수 있다, 라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모든 바람 같지 않기에 차디차고 황폐한 마음의 잣대일지라도 여기서 마칩니다. 현실감으로 중무장하고 살겠다는 마음에는 차분한 냉정이, 차가우리만치 신중을 기하는 무표정이, 무엇보다 상실된 꿈을 해명하기 위한 무정이 도래합니다. 그러니 지나친 현실 속에서 현명한 나는 남겠지만 뒤늦게 수소문했을 땐 정작 그것은 거기 없을 겁니다. 그게 놓쳐버린 감정입니다. 분산되었으나 그러나 다정한 빛이 차안으로, 집안으로 각각 스며듭니다. 그런데 현실이야 어찌되었든, 사랑은 그 미완성으로도 인생을 완성시킵니다.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의 충만한 결합으로 행복을 보장받지 못해도, 부질없는 욕망이라 해도 사랑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여기서 잠시 시를 하나 보고 가겠습니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땅속을 파고들어
한 이태쯤 늘어지게 잠이라도 자고 싶다
부질없는 욕망들 다 게워낸 다음
심장의 박동을 멈추고 깊은 어느 지층
딱딱한 유선형 흙벽돌로 박히고 싶다
잠시 이승을 베고 누운 내 몸 위로
세상을 흔들며 들소 떼가 달려가고
그 뒤를 사바나 푸른 초원을 휩쓸며
해일 같은 불길이 쫒아가고
밀렵꾼이 목을 축이며 지나가고
반정부군의 낡은 지프가 지나가고
내전이 지나가고, 꿈이 지나가고
개 같은 날들이 지나가고
덜 익은 희망이 지나가고
철 없는 사랑이 지나가고
널 몹시 아프게 했던 상처가 지나가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욕설과 연민이,
권태와 욕정과 술주정이 지나가고
행렬을 이탈한 난민들이 지나가겠지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엔
쥐라기 이전부터 앓아온 열병의
유전자는 플랑크톤이 되고
고독은 화석이 되고
의식은 호박琥珀 속에 갇히겠지
우기가 시작되면
풀리는 진흙 속에서 나는 눈뜨겠지만
이 폐허의 수심을 떠나진 못하리라
폐허……, 폐- 하고 발음했을 때
터져 나오는 그 파열음의 허무를,
파열하는 허무를, 허무의 파열을
썩어가는 폐를 가진 자들은 안다
ㅡ정해종,「아프리카 폐어肺魚」,『내 안의 열대우림』(생각의 나무) 2001
동어반복으로 지나가는 날들과 희망과 사랑이 모두 파열하여 페허의 결말이라 해도 허무의 열병, 사랑에 이르고 싶지 않은가요. 폐어 그리고 폐허, 라는 발음이 정말 좋습니다. 터져 나오는 그 허무의 발음이 좋아 폐어로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냥 좋다, 라는 건 참 무책임하고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본래 좋은 시의 이유는 그냥 좋아서, 가 제격이라는 게 제 굳건한 소견입니다.
저도 책의 독자로 작가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고 신상에 관한 것을 찾아본 적이 많습니다. 뜬금없는 것 같아 선물을 보내진 않았지만 오늘 권하는 네 명의 시인은 제가 부단히 찾다가 지치다가 그들의 신상과 죽음과 삶을 언뜻 알게 되고, 하여, 더 이상은 찾지 않고 내 안의 시인으로 남겨둔 이들입니다.
사랑은 합일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참 전부터 무얼 쓸까 고민하다가 또 다른 공부도 할 겸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가 바디우와 바르트, 레비나스, 레나타 살레클까지 곁가지를 뻗치다 보니 공통된 견지(각각의 차이는 또 있습니다만…)가 그것이었습니다. 저명한 석학의 글을 두고 으레 맞는 말이려니 하면서, 그에 못지않게 철학자고 뭐고 간에 모든 게 맞으려고?, 하는 당돌함도 고개를 쳐들었지만 읽어본즉 사랑에 관한 언급은 자못 수긍이 됩니다. 쉬 합일이라 하지 않는 것. 나를 너를 안다, 라 하지 않는 것. 다름을 인정하는 것. 타인을 안다, 이해한다, 체험한다는 모든 것이 아니라 다름을, 차이를, 유한성을 겪는 것이라고요. 한계, 유한성, 모른다, 를 알아야 사랑을 아는 것이라니. 퍽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영화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떤 현실적이고 생활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둘의 표정 너머 세모나게 빛이 스며듭니다.
한 가지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함께할 뿐인데도 쏜살같은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 흥분이 너무도 눈부시다는 것. 시간은 늘 부족했다. 늘.
소설은 에니스가 끝맺지 못한 말로 끝맺습니다. "I swear……." 나는 맹세컨대……, 그 말은 그 외의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맹세컨대 더 이상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와 함께이기에.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시시로 가슴팍에 든 그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은 바람.
사랑은 결코 아름다움만 지속시키지 않습니다. 둘의 차이를 인정해야한다, 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그 인정이라는 과정이 완료가 아니라 진행을 뜻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진행에서의 사랑은 일정부분 폭력적이게도 소유와 구속과 의심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의 맞닥뜨림이 꺼려지고 싫어 자신을 잘 정립하고 단정한 삶만을 추구한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할 수 없으니 마음의 사회학이라 해야 하는지……,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제게도 말입니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ㅡ김중,「사랑」중,『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문학과지성사) 2002
철 지난 키스는 지겨워요
제철의 사랑을 하고 싶어요
철 지난 연애가 날 늙게 한다구요
날 과대평가 마세요
나는 기껏 냉장고에 의지할 뿐이므로
내 사랑은 방부제가 없으므로
내 사랑을 냉동실에 넣어주세요
우정일랑, 칸칸의 냉장실이 적당하고요
군내 나는 탐욕은 김칫독이 그만이지요
저 하늘을 쳐다봐요
하릴없는 내 사랑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나고 있어요
내 사랑이 엉뚱한 구멍이나 뚫고 있다고요
*
전생에 나는 구두쇠였다
한 오리의 마음도 빼앗긴 적 없었다
사랑의 탁발승 때문에
굳센 문턱 몇 번이나 닳아졌어도
애원의 목탁, 달걀처럼 깨져 나갔어도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제 난 냉동실에 살고 있다
여기가 마음에 든다
내 손에 쥐어진 것
털끝 하나 내보낼 수 없다
여전히 나는 구두쇠이다
여전히 사방은 캄캄하다
누구라도 문을 열어
이제 확실히 말해다오
내가 사는 이곳은
사랑의 북극인가 남극인가
나는 감정의 펭귄인가 에스키모인가
ㅡ진이정,「새벽 세 시의 냉장고」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
저는 여태도록 구두쇤지 가난한지 모르겠지만……. 당신 마음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랑이 너무 깊거든. 부디 당신은 사랑으로의 돌아섬 이길요.
그런데 브로크백brokeback이라는 공간이, 와이오밍 주에 있는 산 이름만이 아니라 회귀回歸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회귀. 풀 길 없는 인생이 바야흐로 스르르 놓여납니다. 돌아간다니. 성숙한 언어라는 생각입니다. 왜 광물 따위와 같이 감각성이 없는 무정물도 제 스스로 결핍을 메우고 고귀한 성소처럼 살아 숨 쉬지 않습니까. 잭에 의해 남몰래 보관된 그 자신과 에니스의 셔츠처럼. 에니스에게로 되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피를 묻히고 나이 들어간 연인 잭의 셔츠와 그의 것처럼. 회귀. 사랑의 고조된 감정이 누그러들고 먼 곳을 바라보는 응시가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당신은 회귀를 품고 다시 깊은 사랑 쪽으로 떠나가시길. 바람 합니다. 이 글을 볼쯤엔 후두두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할 테고. 저는 '여름의 어둠은 잠가놓아도 어김없이 누수 되는 관管이었음이니……,' 이런 구절이 들어간 시를 지을까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이른 여름철까지는.
김윤이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트레이싱페이퍼〉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창비, 2011)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과〈시힘〉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