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먼 곳』
문태준의 시는 적요로운 풍경 속에서 슬픔의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망인(亡人)」)이 어룽진다.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시인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형편이 반 썩은 복숭아 한알처럼 되어서” 꿈을 꾸어도 꼭 “몸속으로 자꾸 벌레들이 꼬물꼬물 들어”(「꿈속의 꿈에서는 꿈을 꾸고, “상한 정신”(「사과밭에서」)을 앓고, “작고 네모진 보자기만도 못한”(「보퉁이가 된 나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시인은 쓸쓸함과 비애감에 젖는다.
시인은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불만 때다 왔다」) 돌아온다. 수족관에서 비늘이 너덜너덜한 채 아가미를 겨우 움직이는 물고기에게 “홑청을 마련해줄 수 없고” “폐를 빌려줄 수 없”(「수족관으로부터」)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삶의 무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히려 물고기보다 더 나을 것도 없이 “먼눈으로 우는,무용한 사람”(「모래언덕)」)의 신세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귀신도 어쩌질 못하”는 근심에 시달린다.
삶은 아름답지만 찰나이고 항상 누군가와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음을 아는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내생으로 연결되는 삶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그 원초적인 공간에서 시인은 “한번 내쉬는 큰 숨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무엇이든 되고 싶어하고(「공백(空白)」),“서로에게/받친 돌처럼 앉아서”(「일가(一家)」) “하늘도 흰 물새도 함께 사는 수면”(「물가」)을 그리워한다. “풀밭 속 풀잎이 되고 나니” “모든 게 수월했다”(「아래로 아래로」)고 말하는 시인은 그렇게 사물과 타인과 감응하고 한몸이 되는 교감의 순간을 보여준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서정시 가문의 적자(嫡子)’라고 말했듯이 문태준 시인은 서정시의 전통과 문법을 존중하며 형식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백의 미에 담긴 섬세하면서 온화한 풍경을 펼치며 한 호흡 느린 숨결과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여유롭게 삶의 무늬를 돋을새김하는 그의 시에는 불협화음도 없고 과격한 비유도 보이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가/마루에 서서/밥 먹자” 하고 부르는 정겨운 목소리가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어떤 부름」)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그의 노래는 근심과 시련이 가득한 무상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상처를 위무하고 “나날의 메마름을 견뎌내게 하는 영혼의 강장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웹진 시인광장
시인의 말
눈앞의 것에 연연했으나 이제 기다려본다. 되울려오는 것을. 귀와 눈과 가슴께로 미동처럼 오는 것을. 그것을 내가 세계로 나아가는 혹은 세계가 나에게 와닿는 초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활은 눈보라처럼 격렬하게 내게 불어닥쳤으나 시의 악흥(樂興)을 빌려 그나마 숨통을 열어온 게 아닌가 싶다. 그 빚의 일부를 갚고 싶다. 새로운 시집을 내니 난(蘭)에 새 촉이 난 듯하다. 바야흐로 새싹이 돋아나오는 때이다. 움트는 언어여. 오늘 나의 영혼이 간절히 생각하는 먼 곳이여.
먼 곳 /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시집 『먼 곳』(문학과지성사, 201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