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앞에서 자유로운가, 진리에서 자유로운가
포스트모던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면을 보고 '다원주의(多元主義)'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격히 얘기하면 다원주의라고 할 순 없죠. 다원주의 진리관은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다고 보죠. 하나의 보편적 진리 대신에 각각의 특수한 진리들이 공존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같은 사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이 서로 맞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세계는 넓고 진리는 많다'는 말처럼 곳곳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주장하는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는 경우도 있겠죠. 이런 경우에는 통합 진리타이틀전을 열어서 각 지역마다 진리 선수를 출전시켜 경기를 한다면 챔피언이 등장할 수 있고, 그 챔피언이 장소의 차이를 극복하고 '참진리'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타이틀전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주의적 관점은 진리가 역사적 시기마다 달라진다고 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여러 진리들이 다른 시대에 나타나서 각 시대의 챔피언으로 천하를 주무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타이틀전의 승자가 될 수 없죠. 각 진리들이 다른 시대에 사는 까닭에 타이틀전을 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경우에 '이 시대의' 진리는 '저 시대의' 진리일 수 없어서 서로 다르고 진리가 여럿 있습니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만 진리라면 과연 어느 시대 사람들이 진리와 함께 사는 행운을 누릴까요? 가장 마지막 시대일까요, 아니면 황금시대일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은 진리 자체가 없다고 봅니다. 니체의 진리관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략하게 니체의 진리관을 소개할까요? 그는 진리나 이성을 권력, 지배의 한 형식으로 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자기 삶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 힘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이런 힘-의지가 인간(특히 서구인)의 경우에는 진리-의지와 연결된다는 거죠. 즉 변화하는 세계에서 안정되고 확실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 불변적인 진리를 만듭니다. 진리는 안정되고 확실한 삶을 얻으려는 '전략'인 셈이죠. 이를테면 자연세계를 우리가 만든 개념과 체계로 인식함으로써 변화하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참된 것, 법칙을 찾고 이것에 바탕을 두고 더 큰 힘과 확실성을 마련하려는 생존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힘- 의지의 한 형태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 세계를 현상과 본질로 나누고, 현상세계를 뛰어넘는(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초감각적인 세계를 찾습니다. 니체는 이에 대해서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이런 초감각적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가 허구라고 보고 현실세계가 지닌 구체성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가 볼 때, 진리는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필요 때문에 세계에 던져놓은 인위적인 틀에 지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생성의 세계는 이런 인간의 (고정된) 개념의 체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는 오류이거나 기만입니다. 하지만 이런 진리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죠. 인간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런 진리- 도구가 필요합니다. 마치 세계가 예측가능한 것처럼, 법칙이 있는 것처럼,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성, 진리, 개념, 언어 등은 인간중심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보편타당한 진리는 힘-의지의 한 형태입니다. 더 쉽게 얘기하자면, 어떤 사람이 진리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 사람 뒤에는 힘-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권력과 부를 행사하는 사람보다 진리를 휘두르는 사람이 더 무섭지 않을까요? 이렇게 볼 때 보편적 진리야말로 어떤 공간이나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가장 큰 힘을 행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태도는 진리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를 취합니다. 나아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모두가 진리를 경배하는 의식에서 정해진 절차와 의미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느낀다'고 비난하더라도 그런 소리를 허튼 소리로 여기고 도리어 그들을 비웃기보다는 불쌍하게 여기죠. '가련한 녀석들, 언제 철이 들어서 진리의 마을로 다시 돌아오려나?'
그런데 포스트모던은 이단(異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의식에 참여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진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죠. "우리 주, 진리께 고개 숙이나이다"라고 하는 어린양들이 아닌가봅니다. 진리 앞에서 얌전하게 굴지 않고, 심지어 진리 옆에서 웃기도 해서 엄숙한 판을 가볍게 만들기도 하죠. 그들에게는 진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가봅니다.
이 태도는 진리가 모든 것들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질서지우는데 대해 다양한 차이들로 맞섭니다. 그러한 동일성의 지배가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장악하려는 것에 저항하죠. 그런 동일성은 너무 추상적으로만 말하고 이러저러한 것들의 다름보다는 그 모든 것의 같음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동일성은 딱딱해서 변화에 둔감하고 너무 커서 하나하나에 꼭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똑같은 틀만 반복하라고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런 하나의 같은 목소리가 다양한 목소리를 무시하는 점이 불평을 살 만하죠.
물론 포스트모던은 진리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더 높은 진리에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진리에 목숨을 걸지도, 기존 진리를 더 큰 진리, 완전한 진리로 바꾸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진리 자체를 문제삼습니다. 진리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이들은 진리와 오류를 대립시키고 오류를 버리는 태도가 아니라 오류와 현상의 세계에서 다양한 놀이를 즐깁니다.
양운덕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놀이판에 나섰을까?>(창비, 2001) 175쪽~178쪽 타이핑 채란
20120412-2023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