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슬픈 작가론

미송 2012. 5. 4. 09:40

 

 

 

슬픈 작가론

 

이정문

 

 

 

 기원전 8세기 경에 이오니아 지방을 떠돌던 장님 이야기꾼이 있었다. 그는 절름발이기도 했다. 저녁이면 어른들과 아이들이 그의 앞에 옹기종기 몰려 앉았다. 높은 산에 사는 신들의 이야기, 위대한 영웅들의 모험, 비극적인 운명과 맞서 겨루다가 끝내 패배하는 남녀의 사랑, 복수에 복수가 거듭되는 전쟁이야기가 장님이 달싹대는 입술 끝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 이야기꾼이 바로 그리스문학의 시조(始祖),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라는 서사시로 유명한 호메로스로다. 방랑하는 이야기꾼에 불과한 자신이 지껄인 이야기가 삼천년을 흘러내려 오늘까지 서양의 문학과 철학, 윤리와 실생활 속에서 숨쉬며 교육과 문화의 토대가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후대의 시인들이 그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지만 아직도 그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이야기는 없다. 또한 그가 언급한 전설 속의 트로이전쟁은 그 성터가 발견됨으로서 사실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는 각종 진기한 이야기로 청중을 사로잡던 자신의 이야기꺼리 만큼이나 호기심이 강했던 모양이었다. 호메로스는 그의 이야기를 듣던 어떤 어린아이가 던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원통함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에 관한 위와 같은 이야기도 후대의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정작 그의 고향이 어디며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어떻게 살다 죽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라는 작품마저도 호메로스가 지었는지 또는 정말 호메로스라는 인물이 존재했는지조차 증명되지 않는다. 다만 많은 그리스 시인들이 호메로스의 작품을 인용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고, 그의 존재가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사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한 개인이 지어낸 이야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정도의 대서사시가 탄생되려면 사실이건 상상이건 이야기의 씨앗이 전설이 되어가는 긴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 수많은 이야기꾼들이 참여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소설을 패관문학(稗官文學)이라고 한다. 패관(稗官)은 고대 관직명으로서 백성들의 여론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었고, 그 생생하고 실감나는 보고가 서류화됨으로서 소설문학으로 발전한다. 이야기꾼이란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한층 실감나고 흥미롭게 각색하여 현실에 적응시키는 자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이야기의 조력자인 것이다. 그러나 무명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역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BC 3세기에 집필한 <호메로스 전기>는 거짓으로 유명하다. 다만 살아서의 이야기꾼은 죽어서도 이야기꺼리가 되어 그 스스로 전설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야기는 그것을 지어낸 작자가 중요치 않다. 또한 대부분의 고전은 한 작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달되던 것이 누구에 의해서 정리된 것에 불과하다. 공자가 지었다는 육경(시경, 논어, 중용, 예, 악, 주역)도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편집한 것일 뿐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버금가는 동양의 고전인 <삼국지>는 원래 진수(233~297)의 단순한 역사기록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남북조시대의 학자 배송지(372~451)가 주석을 붙이는 과정에서 저잣거리의 야사(野史)나 잡전(雜傳)을 끌어다가 윤색했다. 여기서부터 객관적인 역사기록인 <삼국지>에 백성들의 입담이 가미되기 시작하고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대문장가 소동파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때부터 이미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문 이야기꾼들이 존재한 모양이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다.

“아이놈들이 귀찮게 굴어 돈을 몇 푼 주어 내쫓으면 놈들은 그 돈으로 이야기꾼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으로 몰려간다. 유현덕이 패하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도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환한 표정이 되어 이야기꾼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신이 나서 따라 부른다.”

오늘 우리가 읽는 <삼국지>는 무려 천년 이상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각색되어 내려오던 것을 14세기에 나관중이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꾼들 처지가 그렇지만 나관중의 생애 역시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언젠가 유명한 최모 작가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하기를, 작가는 이런 프로그램이나 모임에 자꾸 얼굴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작품이 훌륭하면 독자들은 작가를 궁금해 하지만, 이는 마치 자장면이 맛있다고 주방장을 불러내는 격이라고 했다. 손님은 그냥 자장면만 맛있게 먹고 가면 된다는 말인데 사실 이처럼 겸손한 작가론은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작가는 죽어서 작품만 남긴다. 물론 좋은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이 따라다니지만 역대에는 무명작가들이 더 많았고 또 그들이 유명작가의 작품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호메로스는 당대나 그 이전 무명의 다른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전수받았고 그에 살을 덧붙였을 수도 있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정리하는 데는 다른 이야기꾼들이 천년 이상 각색해 온 노력이 한 몫 했을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탄식처럼 세상에는 창작(創作)이란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드물 것이다. 오직 기존 작품의 모방과 변형, 그리고 각자의 시대에 맞도록 기존의 작품을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내놓을 뿐, 문학의 독창성이란 없는 것을 새로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똑같은 재료로서 틀과 형식만 바꾸어 낼 뿐인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나 겪었던 사건은 이미 다 나왔다. 더 이상 새로운 말도 사건도 없다. 그래서 문학은 창조가 아니라 있던 물건을 고쳐 쓰는, 말하자면 과거의 말과 사건의 재활용과 재해석일 뿐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집구시(集句詩)라는 것이 있다. 집구시는 여러 시인의 시구를 한 줄씩 따와 마치 창작된 새로운 시처럼 만드는 것인데, 여러 명의 시를 누덕누덕 기웠다는 의미에서 백가의(百家衣)라고도 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산거집구(山居集句) 100수가 유명하다. 곰곰이 살피면 시나 소설의 그 어느 것이 새로울까? 문학이란 삶의 희로애락을 돌고 도는 누더기를 기워 놓은 백가의와 같아, 수레바퀴의 중심축인 삶의 희로애락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오직 새로운 시대에 맞춘 디자인으로 문학은 다시 태어날 뿐인 것이다.

 

시인은 언어의 암살자라고 한다. 모든 시어(詩語)는 일회성이라는 운명을 가졌기에 다시는 써먹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자기가 한번 썼던 시어를 따로 정리하여 시어의 공동묘지를 만든다. 최소한도 자기가 썼던 글의 모방을 피하여 한번도 안 써먹었던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도 곰곰이 살피면 같은 감정과 시상(詩想)의 말바꿈에 불과할 적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숙명적으로 같은 감정과 정서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새로운 느낌, 감정, 정서에 퍼뜩 놀랐고 그에 새로운 언어의 옷을 입혔지만, 이미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여 글로 남긴 일이 비일비재하여, 그저 저 혼자 놀랐고 저 혼자 신났을 뿐, 알고 보면 과거의 글을 좇아갔을 뿐이다. 아니면 재활용하여 새로운 느낌으로 포장하여 내놨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유명작가라도 자랑할만한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남의 글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써먹은 교활함”이다.

 

 

갓 등단한 신인들의 눈빛은 당당하다. 원로문인의 눈빛은 슬퍼 보인다. 이는 대지를 박차고 떠오르는 태양과 쇠하여 기우는 석양의 엇갈림이다. 중국 송나라 인종 때에 문인들은 형벌이 다가와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이 닥쳐와도 담담했지만 구양수의 평가만은 두려워했다. 과거시험을 채점하던 구양수가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며 탄식을 했다.

 

“이 늙은이는 이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소.”

천하의 문장가 구양수의 손아래에 젊고 패기만만한 소동파의 답안지가 놓여져 있던 것이었다. 그 후에 구양수는 자기의 아들과 대화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잘 기억하거라.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양수의 예상대로 후에 소동파는 필명을 날렸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까지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원로의 슬픔은 떠오르는 태양과 기우는 석양이 아니다. 이는 극히 사사로운 감정일 뿐이다. 써도 써도, 가도 가도, 진정한 창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에가 실을 뽑듯 과거에 수없이 많은 글을 썼어도 그저 옛사람의 발자취를 따르다 만 것이요, 새로울 줄 알았던 자신의 글이 허접한 과거의 쓰레기통만 뒤지다 만 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태양인 줄만 알았던 자신의 작품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과거 이야기의 재반복이라는 붓 끝의 허망함이다.

중국 당나라의 태종은 대궐의 붉은 대문을 열고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서는 젊은 과거급제자를 굽어봤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댔다.

“천하의 대어(大魚)들이 내 손아귀에 걸려들었다.”

이야기라는 대왕의 손아귀에 걸려든 문인들, 아무리 출중한 인재라도 그 스스로가 이야기의 제왕이 될 수 없다는 운명, 그리하여 문학의 덫에 걸린 채 무릎만 꿇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슬픈 것이다. 이것이 작가다.

 

2008년 1월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