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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시

미송 2012. 4. 7. 09:22

 

 

 

에머슨이 목사직을 그만두게 된 것에 대한 이유를 그는 [문제 The Problem]라는 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시의 시작 부분을 보기로 하자.

 

 

문제

 

교회(敎會)도 좋고 고깔도 좋다

영혼(靈魂)의 예언자(豫言者)도 존경한다

내 마음에 수도원(修道院)의 복도는

감미로운 노래와 구슬픈 미소처럼 안겨온다

그러나 그의 신앙(信仰)의 정도가 어떻든간데

그런 고깔 쓴 이는 되고 싶지 않다

 

그가 입은 옷은 무슨 매력이랴

입고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니

 

장엄한 제우스 상(像)을 만든 젊은 피디아스는

허영되거나 천박한 생각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간사(姦邪)한 입술에서는

감동적(感動的)인 델피 신전(神殿)의 신탁(神託)이 나올 리 없다

수수한 마음에서

해묵은 성경(聖經) 내용(內容)이 굴러 나왔다

제국(諸國)의 연도(連禱)는

아래의 타는 속마음으로부터

화산(火山)의 화염(火焰)처럼 터져 나왔다

사랑과 슬픔의 영창(詠唱)들이다

베드로 성당(聖堂)의 둥근 천장을 만들고

기독교 로마의 복도에 각(角)을 지은 손은

진지한 성심(誠心)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또한 의식한 것보다 더 훌륭히 지어냈다

감응(感應)하는 석재(石材)는 아름답게 자라났다.

 

 그는 그가 고깔을 쓰고서 종교의 관습을 따르는 목사가 되지 않는 이유를 예술가의 비유로 보여 준다. 즉, 장엄한 제우스 상을 만든 젊은 피디아스는 천박한 생각에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또한 베드로 성당의 둥근 천장을 만들고 기독교 로마의 복도에 각(角)을 지은 손은 진지한 성심을 가진 사람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종교의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성심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지어내는 예술가처럼 살겠음을 천명한다. [문제]라는 시 이외에도 에머슨은 [스핑크스 The Sphinx]라는 시에서도 개인적인 사정을 담고 있다. <중략>

 

에머슨의 거의 모든 시가 철학적인 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에 볼 두 편의 시는 특히 대표적이다.

 

 

 범천(梵天)

 

붉은 살해자가 살해한다고 생각하고

살해당한 자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내가 존재하고 지나가고 되돌아서는

미묘한 방법을 잘 모르는 것

 

먼 것도 잊혀진 것도 내게는 가깝다

그늘이나 햇빛은 동일(同一)하다

정복된 신들이 나에게 나타난다

수치(羞恥)나 명예(名譽)나 내게는 마찬가지

 

나를 무시하는 자는 잘못 생각하는 셈이다

나를 피해 가는 이에게는 나는 날개다

나는 회의(懷疑)하는 자요 회의(懷疑) 자체다

나는 바라문이 부르는 찬송가이다

 

강한 신들은 나의 거주지(居住地)를 그리워하고

성(聖)스런 칠인(七人)도 그것을 헛되이 그리워한다

허나 선(善)을 사랑하는 겸손한 자여!

나를 찾고 하늘에 등을 돌려라.

 

 

이 시는 브라마(Brahma) 또는 브라만(Brahman)이라고 불리우는 힌두교의 범천 사상을 다룬 것으로, 에머슨의 대령(Oversoul)은 여기에 기초를 둔 것이다. 네 개의 연으로 된 이 시에서 브라마가 마야(maya)의 환영(幻影)을 물리치고 편재(遍在, omnipresent)하는 자신의 특성을 보여 준다. <중략>

 

 

개별(個別)과 전체(全體)

 

저기 붉은 옷을 입은 들판의 촌뜨기는

산정(山頂)에서 내려다보는 그대를 모르고 있다

고지(高地)의 농장에서 우는 암소의

먼 울음 소리는 그대 귀를 즐겁게 해 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정오에 종(鐘)을 치는 교회의 일꾼은

위대(偉大)한 나폴레옹이 말을 세워

즐거운 마음으로 귀기울이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대열(隊列)이 저기 알프스 산을 휘돌아가는 동안

그대의 생애가 이웃 사람의 신조(信條)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체는 각자가 필요한 것,

단독(單獨)으로 아름답거나 좋은 것은 없다

나는 새벽녘 오리나무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참새 소리를 천상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저녁때 둥우리째 집으로 데려왔다

새가 노래는 부르되 재미가 없다

강과 하늘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은 까닭-

그는 내 귀에 노래해 주었으나 그들(강과 하늘)은 내 눈에 노래해 주었다

기묘한 조개들이 해안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 파도의 거품이

패각(貝殼)에 맑은 진주를 뿌려 주었다

야만스러운 바다는 그들의 도피를

포효로 맞아 주었다

나는 해초와 거품을 씻어내고

바다 산(産) 보물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보기 싫고 떠들썩한 이 물건들은

해안에 아름다움을 두고 온 것이다

해와 모래와 시끄러운 소리 속에

애인은 자기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뭇처녀와 함께 있는

백설 같은 성가대 옷이

그녀의 아름다움이었음을 미처 몰랐다

드디어 그의 암자(庵子)로 그 여인은 오게 되었다

숲에서 조롱(鳥籠)으로 옮겨진 새 한 마리처럼

그러자 그녀의 황홀은 깨어지고

선량한 아내일 뿐 선녀(仙女)는 아니다

그래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리(眞理)가 제일이다

아름다움은 풋내기 시절의 착각(錯覺)

유치한 장난과 함께 던져 버리자."

이렇게 말하는 동안, 발치에서는

석송(石松)의 가시 위로

자란초(紫蘭草)가 예쁜 화관(花冠)을 펼쳐놓았다

머리위엔 빛과 신성(神性)을 가득히 담은

영원한 하늘,

그러자 되돌아오는

강(江)물 소리, 아침 새 소리-

아름다움은 감각(感覺)에 은근히 스며들어

나는 완전한 전체(全體)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시는 에머슨이 쓴 [자연론 Nature]의 제3부인 '아름다움'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자연적인 형체의 총화이다. ...홀로 있는 것 가운데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 전체적으로 아름답지 않고는 아름다워질 수가 없다. 단 하나의 대상이 그러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암시할 때만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에머슨은 이 시에서 일원론적인 철학(monistic philosophy)을 보여 주기 위하여 개체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시는 문학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그의 철학적인 명제를 시의 율격으로 포장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에머슨은 미국시에서 아버지 또는 대부(大父, godfather)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후세의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과적으로 에머슨의 공과(功過)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에머슨이 미국시의 기틀을 잡았다는 면에서 그는 우러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다음 두 가지의 잘못은 크게 돋보인다. 첫째는 그의 시가 너무 철학적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감성보다는 이성이 그의 시의 특징으로 작용한다. 이는 시가 감성의 소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주 큰 결점일 수 있다. 그의 시는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로고스중심주의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은 그의 두번째 결점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의 두번째 결점은 그가 동양사상까지를 포괄하는 폭넓은 아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남북전쟁의 불씨가 된 인종 및 노예 문제에 너무나 안이한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편협한 백인 우월주의적인 편견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정호 <영미시의 포스트모던적 읽기 [베오울프에서 T. S. 엘리엇까지] 259~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