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기무라 키요타카 <화엄경을 읽는다>

미송 2012. 5. 9. 18:09

기무라 키요타카 <엄경을 읽는다>(불교시대사, 2002년) 中

 

신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 깊이도 잴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인 채로 둘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스스로를 신께 바쳐, 신의 사랑의 제물이 되도록 하게 하는 우리의 사랑에도 한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흔해빠진 당연한 것에는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신의 목마름을 우리는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더 테레사, 사랑을 말하다>, 日本敎文社,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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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수보살에서 선재동자로

 

문수보살의 길 떠남

우선, 문수보살은 자신의 거처인 '선안주(善安住)'라는 집을 나와서 동행의 보살들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자 이를 안 사리불 등 육천 명의 비구들이 그에 합류할 것을 원한다. 이때 문수보살이 설하는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대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좋은 집안(良家)의 남자 혹은 여자가 열 가지의 큰마음을 완성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니 보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1) 넓고 큰마음을 일으켜 일체의 선을 실현하는 힘을 기르며 어디까지나 후퇴하지 않고(이것으로 됐다고)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 2) 일체의 부처님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면서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 3) 정직하게 일체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면서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 4) 널리 보살의 바라밀을 실천하면서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  (중략)

 

요컨대 누구든지 대승의 마음을 일으켜서 끝까지 실천에 힘쓴다면 반드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수보살의 가르침이다. 그러자 이것을 들은 비구들, 즉 성문들이 모두 '걸림없는 청정한 눈'이라는 삼매를 얻고, 나아가 보살의 실천을 완성했으며, 이때 문수보살은 더욱 나아가 실천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보현행(普賢行)에 그들을 안주시켰다고 한다. 

 

선재동자와의 만남

이렇게 해서 문수보살은 성문인 비구들을 인도한 뒤에 남방으로의 여행을 계속하여 각성(覺城)이라는 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조일체법계경(普照一切法界經)>을 설시하는데, 모여든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재(수다나)라는 소년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내력을 관상(觀想)한다. 선재동자는 과거의 뛰어난 행위의 과보로 보물로 가득찬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것을 관한 다음 문수보살은 "그대를 위해 미묘한 부처님의 법을 설하리." 라 하고, 그를 위해 부처님들의 바른 가르침을 설시한다. (중략)

 

 

선재동자의 고백과 기원

 

(방황하는 저는) 세 가지 생존의 세계를 성으로 삼고,

교만을 담벽으로 하고,

온갖 (미혹의) 길을 출입구로 하고,

욕망을 참호로 해서,

 

어리석음의 어둠에 덮여

언제나 삼독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악마가 왕이 되며

어리석은 자가 모여들고 있습니다.

 

애착이 떨어지지 않고,

아첨으로 바른 실천이 방해되고,

의혹에 의해 지혜의 눈이 가리워져 있으니,

갖가지 삿된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중략)

 

청정한 지혜의 눈을 뜨고

(그것을) 몸의 장신구로 삼고 있는

오묘한 지혜를 갖는 왕은 최고의 관을 쓰십니다.

법왕이시여, 어여삐 여기사 저를 보살펴 주소서.

 

미혹에 빠져 있는 스스로에 대한 탄식과 문수보살을 향한 원을 절절히 호소하고 있다. 이는 경전이 설하는 대로, 선재동자가 이미 과거세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보살의 길을 닦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리고 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선재동자의 구도의 여행의 출발점에 이처럼 현실의 자신을 주시한 고백과 기원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199 - 204쪽.

 

 

2. 선재동자의 여행

 

선재동자의 스승들

문수보살의 인도로 시작하여 보현보살에게서 성불의 예언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선재동자의 여행은, 많은 좋은 벗’, 즉 스승과의 만남과 그들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좋은 벗으로서의 스승의 수는 54(53명 혹은 55명으로 꼽힌다)인데, 그들의 전체적인 특징은 지위, 신분, 직업, 성별, 및 지도방법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이다. 선재동자의 스승이 되는 사람들 중에는 보살, 비구, 장자, 여성 신자, 선인, 바라문, 소녀, 소년, 국왕, 상인, 어부, 여신, 금세공사 등이 있고, 그 중에는 분노나 애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유복한 재가자나 여성이 수적으로 많으며, 또한 그들이 선재동자의 수행의 전진 과정으로 보아 비교적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원본 <간다 비유하>를 낳은 사상운동의 모태가 인간의 진실을 깊이 통찰하고 인간의 평등의 이념을 높이 내걸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주된 지지기반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과 여성 신도층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선 처음에 문수보살이 어떤 식으로 선재동자를 구도의 여행길에 내보내는지를 보자. 경전에 의하면, 그는 선재동자의 고백과 기원의 시를 듣고는 코끼리의 왕과 같이 천천히 몸을 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 한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그대여. 능히 최고의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서 좋은 스승을 찾고 좋은 스승에게 다가가 보살의 실천에 대해서 묻고 보살의 길을 구하려고 하는구나. 그대여, 이것이 보살의 첫째가는 창고이며, (여기에는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 , 좋은 스승을 구하고 다가가서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여, 좋은 스승을 구하고 다가가서 공경하고 일심으로 공양하며 보살의 실천에 대해 묻는 것이 좋다. 어떻게 보살의 길을 닦고, 어떻게 보살의 실천을 완성하고, 어떻게 보살의 실천을 청정하게 하고, 어떻게 보살의 실천을 추구하고, 어떻게 보살의 실천을 낳고, 어떻게 보살의 길을 바르게 염하고, 어떻게 보살의 경지의 존재 방식에 관계하고, 어떻게 보살의 길을 충실 발전시키고, 어떻게 보살은 보현의 실천을 몸에 익히는가라고.

 

결국 선재동자가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것을 칭찬하고 선지식을 찾아가서 보살의 실천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다양한 스승들

선재동자가 세 번째로 방문하는 이는 해운(海雲) 비구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비구의 실천 그 자체다. 그는 12년간 남방의 해문국(海門國)에 살면서 바다를 자신의 경계로 해서 바다를 관찰해 왔기 때문에 아름다운 바다에 사는 부처님에게 부처님만의 경지를 설하는 <보안경(普眼經)>을 들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바다 그 자체가 바다를 보고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진실 이는 우주의 진실에 통한다-을 열어 보여줌을 표현하고 있다. 해운 비구의 깨달음이란 바다에서 배우고 바다를 근저에서부터 알며 대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과 재구축이 절박한 오늘날 우리는 이 이야기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 205-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