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윤후명,「사랑의 방법」
미송
2012. 5. 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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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록색 등대가 내 사랑의 다른 표상 같다고 느낀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말한 대로 초록색 등대를 다른 데서도 본 적이 있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많은 경험을 지나온 나이에는 그것이 실제의 일인지 기시감 때문인지 가리지 못하게 눈을 흐려놓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 대신 젊었을 때는 술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젠장, 젠장, 아아, 하면서 죽음까지도 기웃거린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기시감의 다른 말은 없는 것일까. 언젠가 본 느낌이 든다는 까닭으로 누군가 사랑에 빠진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일본으로 관광을 가서였다. 후지산 중턱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마지막 일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부터 나는 기시감에 시달렸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느낌. 나는 호텔 밖으로 나와 옆의 슈퍼에서 담배를 샀다. 작은 구름다리. 산으로 오르는 아스팔트 길. 마지막 난 산길을 오르면서 나무들의 사진도 찍었다. 산길의 끝에는 온천의 끓는 물에 삶았다는 달걀을 팔았다. 나는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내려와서 기념품점에서 올빼미 모양의 나무 온도계도 샀다. 어서 타세요. 떠납니다. 그때 버스로 달려가며 나는 알았다. 이것은 기시감이 아니다. 언젠가 이와 똑같은 여행을 실제로 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랬었구나. 나를 깨닫게 한 것은 올빼미 온도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느낌일 뿐이라고 나를 달랜 무엇이 더 문제였음을 나는 알았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었다. 현실 그대로였다. 지난 저녁부터 내가 겪은 일은 예전하고 똑같았다. 작은 폭포 호텔. 슈퍼에서 산 담배. 산길을 찍은 사진의 나무들. 달걀 한 봉지. 올빼미 온도계. 어서 타세요. 떠납니다. 놀라움과 함께 순간적으로 맥이 빠졌다.
그렇다면 언젠가 술 많이 마시고 어떤 여자와 키스했다고 믿은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술자리에서 옆 동료의 눈치를 슬쩍 보아 나눈 키스였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기시감은 희망 사항과 연결되는 것일까.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오리무중이 무슨 뜻인지도 오리무중이었다.
게눈으로 초록색 등대를 보는 나는 옛일을 회상한다. 옛일이 사실이 아니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내 마음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그것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초록색 등대가 초록색 등대라면 초록색 등대가 틀림없다.
● 작가_ 윤후명 - 1946년 강릉 출생.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명궁』, 소설집 『둔황의 사랑』, 『협궤열차』, 『여우 사냥』, 『삼국유사 읽는 호텔』 등이 있음.
● 낭독_ 김종태 - 배우. 연극 〈878미터의 봄〉, 〈깃븐 우리 절믄날〉 등에 출연.
● 출전_ 『사랑의 방법』(문학나무)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이십대 때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러 수원으로 두 번 갔지요. 한 번도 타지 못했습니다. 수원으로 가는 동안 여자와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두 해를 물리고 혼자 찾았을 때 협궤열차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왜 매번 수원으로 갔는지 모릅니다. 인천으로 갔다면 한 번쯤 탈 수 있지 않았을까. 앞과 뒤로만 움직이는 기차는 곧잘 시간으로 환유됩니다. 제 행로대로라면, 인천발 수원행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셈일 테니 뭔가 교정할 여지가 있지 않겠어요. 어떤 길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걸까요? 기시감의 원리는 모르지만 우리를 찰나에 기억의 고아로 만들어놓는 시간의 허방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초록 등대를 실재라고도 환상이라고도 우기기 힘들어지지요. 그래서 “양들을 파는 시장을 아세요?” 하고 어느 길에서 누군가 묻는다면 처음 듣는 양 뚱한 표정은 짓지 마세요.
문학집배원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