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양애경, 「조용한 날들」

미송 2012. 5. 14. 09:08


 

 

양애경, 「조용한 날들」

 
행복이란
사랑방에서
공부와는 담쌓은 지방 국립대생 오빠가
둥당거리던 기타 소리
우리보다 더 가난한 집 아들들이던 오빠 친구들이
엄마에게 받아 들여가던
고봉으로 보리밥 곁들인 푸짐한 라면 상차림

 

행복이란
지금은 치매로 시립요양원에 계신 이모가
연기 매운 부엌에 서서 꽁치를 구우며
흥얼거리던 창가(唱歌)
 
평화란
몸이 약해 한 번도 전장에 소집된 적 없는
아버지가 배 깔고 엎드려
여름내 읽던
태평양전쟁 전12권

 

평화란
80의 어머니와 50의 딸이
손잡고 미는 농협마트의 카트
목욕하기 싫은 8살 난 강아지 녀석이
등을 대고 구르는 여름날의 서늘한 마룻바닥

 

영원했으면… 하지만
지나가는 조용한 날들
조용한… 날들…  

 

시_ 양애경 - 1956년 서울 출생.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사랑의 예감』,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내가 암늑대라면』, 『맛을 보다』 등이 있음. 현재 공주영상대학교 방송영상스피치과 교수로 재직 중.

낭송_ 황혜영 - 배우. 연극 〈타이피스트〉, 〈죽기살기〉, 등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하모니〉 등에 출연.

출전_ 『맛을 보다』(지혜)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시인은 현재 행복하고 평화롭다. 행복이라는 말과 평화라는 말은 커다란 철학적 주제가 될 만하게 거창한 말들이지만 그 속살은 소박한 것이다. 행복과 평화, 이 이상적 상태는 대단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잘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쟁은 참혹한 것이지만 전쟁 이야기를 읽는 건 평화.
「조용한 날들」은 평화로운 그림인데 가슴이 뭉클하게 만든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개 시인이 들려주는 것과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을 테다. 그 기억이 건드려진다. 나도 행복했었지, 평화로웠지. 끄덕끄덕끄덕.

 

참 좋은 시다. 그림이 확 그려진다. “평화란/ 80의 어머니와 50의 딸이/손잡고 미는 농협마트의 카트/목욕하기 싫은 8살 난 강아지 녀석이/등을 대고 구르는 여름날의 서늘한 마룻바닥”. 지구가 농협마트의 카트 바퀴처럼 돌돌돌돌돌 순탄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행복이나 평화는 어떤 조용함이다. 마지막 연이 보여주는, 가는 세월의 안타까움이 마무리로 톡 떨군 향긋한 식초 한 방울처럼 「조용한 날들」의 맛을 돋군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띵똥. e-mail 창에서 가끔 들려오는 소리. 오늘은 어떤 소식일까 궁금해 하며 우체통을 연다. 조용한 목소리로 시작하여 조용한 목소리로 끝맺음하는 한편의 시우선은 시끄럽지 않아서 좋네…하웃는다. 끄덕끄덕에 한 줄 아니 여러 줄을 매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행복과 평화의 속살은 소박하다'는 말이 있어서 더 좋은 해설

 

그렇다. 두 개의 프레임으로밖엔-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존재증명을 할 줄 모르는 인간보다, 때로는 벙어리 스크린 혹은, 그 위에 방긋 떠오르는 수신인 다수의 편지 한 통이 더 따스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