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장석주<안성 - 주역시편·177>외

미송 2012. 5. 18. 18:27

 

 

 

안성 - 주역시편·177

장석주

 

 

산수유 붉은 열매를 등 뒤에 두고

돌부처 한 분,

세월을 빚는 청맹과니구나.

눈도 코도 뭉개지고

남은 건 초심뿐.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으니

무심하구나.

꽃 지고 붉은 열매가 지기를

기백 번,

또다시 꽃 없는 가을이

저 목련존자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구나.

 

 

만해 한용운 스님은 “푸른 산 쓸쓸한 집/ 사람 가고 병만 늘어/ 시름만 끝없는 날/ 가을꽃 피어나네”라고 시를 지었지요. 중국의 전설적인 은자 한산(寒山) 또한 말을 몰고 옛 성을 지나며 헐어진 성벽과 크고 작은 무덤을 보고선 “슬프다, 어찌 모두 이런 풍경 뿐인가/ 오래 두고 남을 이름 하나 없네”라고 노래했지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한 것이지요.

 

쏜 화살과 같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꽃 지고 붉은 열매 지”는 시간을 우리는 살지요. 시간의 수레바퀴는 쾌속(快速)으로 우리의 등 뒤를 지나가고 지나가지요. 이러한 우리의 형편을 잘 알기에 시인이 돌부처를 본 순간 시흥이 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백 번에 걸쳐 계절의 변화를 겪어 “눈도 코도 뭉개”진 돌부처를 본 순간 시인은 감각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담담하고 견고한 불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팔리는 마음이 없고 간섭을 떠난 마음, 그것이 초심 아니겠는지요. <문태준>

 

 

접시와 오후

오규원

 

 

붉고 연하게 잘 익은 감 셋

먼저 접시 위에 무사히 놓이고

그 다음 둥근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온전하게 놓이고

그러나 접시 위의

잘 익은 감과 감 사이에는

어느 새 ‘사이’가 놓이고

감 곁에서 말랑말랑해지는

시월 오후는

접시에 담기지 않고

밖에 놓이고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마음의 매무새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줍니다. 이 시에는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바라보는, 조용한 응시가 있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응시의 힘에 의해 대상과 세계는 숨기고 있던 것을 바깥으로 드러냅니다. 누군가 감 셋을 둥근 접시에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 시는 동작과 장면의 바뀜을 유수(流水)처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시가 특별하고 뛰어난 점은 그와 같은 움직이는 풍경, 행위의 동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과 ‘접시’와 ‘시월 오후’라는 각각의 주체들을 생생하고 투명하게 독립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독립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주의하여 헤아려 보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감과 접시는 그 자체로 순수존재여서 “무사”하고 “온전”합니다. 그리고 이 무사하고 온전한 존재들은 서로에게 상관하여 작용합니다. 말랑말랑해지는 감 때문에 시월 오후가 말랑말랑해집니다. 감과 감이 벌어져 놓인 자리에 생겨나는 ‘사이’나 접시의 안과 바깥은 분할된 공간이 아니라 존재들이 교통(交通)하는 공간입니다. <문태준>

 

 

小曲

박남수

 

 

구름 흘러가면

뒤에 남기는 것이 없어 좋다

짓고 허물고, 결국은

푸른 하늘뿐이어서 좋다.

 

한 행의 시구

읽고 나면 부담이 없어서 좋다

쓰고 지우고, 결국은

흰 여백뿐이어서 좋다.


평범한 사람

남기는 유산이 없어서 좋다.

벌고 쓰고, 결국은

돌아가 흙뿐이어서 좋다.

 

시인 정지용은 박남수 시인의 시를 일러 “시가 지상(紙上)에서 미묘히 동작”한다고 했지요. 박남수 시의 불가사의한 리듬을 치켜세워 말한 것이지요. 이 시에서도 탄력 있게 흔들리고, 보태며 움직이는 시행의 전개를 볼 수 있지요.

“짓고 허물고”, “쓰고 지우고”, “벌고 쓰고” 사는 일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별다를 게 없지요. 시인은 세움과 무너짐, 고안과 퇴고, 쌓음과 없앰의 전후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지요. 그 모든 의욕적 궁리와 창조가 헛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지요.

그러나 시인은 허사가 된 그 자리가 오히려 청상(淸爽)하다고 말하네요. 시인에게 무욕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겠지요.  우리가 “뒷발을 차며/ 앞으로 쏘아나가는 것”도, “이긴 자도 진 자도 없는/ 이 험난한 레이스”를 벌이는 것도 종내 소멸을 위한 것이라는 높은 안목과 식견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