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휴일 단상
휴일 단상
아이들이 쓰는 외계어로 아줌마를 지름신이라고 한단다. 소리를 버럭 질러댄다는 뜻이 아니라 충동에 의해 물건을 마구 사 들이는 짓이란 뜻이다. 누나는 된장녀, 아빠는 꼼수대왕, 게다가 엄마에게 지름신까지 내리면 집안 풍비박산은 시간 문제라는 우스개소리를 들었다. 순수 우리말도 어려운데 외계어까지 배워야 하는 요즘 나는 좀 힘들다.
y 방과후아카데미에서 6학년 담임이 된 나는 작은 참꽃들과 지내는 재미도 있지만 고유한 어른성마저 축소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앉은뱅이 꽃 앞에선 키를 낮추고, 키 큰 해바라기 앞에선 고개를 드는 삶. 그러나 지나온 삶 속에서 나는 때로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 정체성을 실종당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자아이들 숲에 있다보니 어느새 나도 자잘스러워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에서 여전히 눈팅을 즐기는 토요일 연휴. 다행인지 모르나 하루 이틀 아이들의 다채로운 톤에서 벗어나 즐겨 듣던 음악을 다시 듣는 - 마음 먹기에 따라선 아이들 소음도 음악이지만 - 일은 휴식을 준다. 규칙도 없이 제 멋대로 튀어오르는 재즈키타 소리가 팅팅-.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습관이 - 옆에 누가 누워있나 확인하는 것 빼고-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속쌍거풀이 풀리지 않았나. 얼굴이 붓지 않았나. 살이 불어나 얼굴에 표가 나지 않을까 하는. 그 보다 깊숙한 의식은 존재확인일 것이다. 안녕하니, 하며 거울 속 나를 본다. 부시시해진 얼굴에게 너그럽게 웃어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오른쪽 볼이 빨갛다. 배개닛에서 물든 것 같다. 우는 꿈을 꾼 것 같진 않은데 (모르지.. 꿈이란게 특히, 허드레 꿈이란게 쉽게 기억나는 것도 아니니). 혹시, 침을 흘렸을 수도 있겠다.
적막과 고요에서 출발한 우주 그 우주 안에 생명을 지녔다고 날뛰는 생물체들이 어쩌면 반란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본시 생명의 원류는 죽음에서 비롯된 파라독스한 사건일 뿐. 삶보다 죽음이 더 솔직한 게 아닐까. 죽음 안에서의 고요가 더 솔직한 평화가 아닐까 하는 화두로,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베란다에서 사는 내 친구들 흙과 물과 태양만 있으면 잘 사는 광합성 식물들, 무엇보다 푸르른 것들은 말줄임표로 살고 있었다. 죽어가는 일에 초조한 빛도 없이 한 자리에 놓아두어도 소리치치도 않고. 마흔 중반의 오래된 아줌마가 눈팅만으로라도 푯말을 기웃거려주면 그저 환하게 웃어줄 뿐이다.
세상엔 어른이 되고서도 아이처럼 시끄러운 사람들로 북적대는데....
길이 미끄럽지 않은 여름밤엔 자동차 소리도 크게 들린다. 빠른 길로 질주하려던 겨울 자동차들은 지금쯤 어디에 정차를 했을까. 집을 구할 때 나는 우선 주차장 넓은 게 맘에 들었었다. 집에서 내려다 보면 강남의 아무개 집 주차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 참 많이도 들락거렸지 당신도. 어디에 주차해야 할지 몰라 돈까지 들여가며 어지간히도 헤맸지. 싼 곳 부터 십이만원씩이나 내야 하는 그 곳 주차장.... ?
오랫만에 차를 몰다보면 후진해서 주차할 때 시간을 꽤 잡아먹곤 한다. 넣었다 뺐다를 한참 해야 제대로 세우고 들어온다. 그래서 자동차는 오래 주차했다가도, 그냥 몰아주기도 해야 한다는 걸 새삼 배웠던 거다.
주말이나 평일에 꾸준히 들려보는 블러그가 있다. 문학의 보고 같은 유익한 곳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가니까 도통 말 수가 없던 주인장의 양해의 글이 올라 있었다. 7월 23일 부터 저작권법 개정안이 엄격해져서 그간 올렸던 문학자료들 대다수를 비공개로 설정하겠다는 말씀이었다. 물론, 그간 많이 훔쳐와 숨겨놓기도 했지만, 순간의 충격.
네티즌들의 인터넷 셔핑이 부자유스럽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음악이나 사진이나 남의 글을 쉽게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엄격해진 저작권법 개정안에 은근히 부화도 난다. 그 블로그의 주인은 상업적 목적에서 문학자료들을 올려놓은 게 아니었는데, 뭔가 엄청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다. 시중에서 잘 만날 수 없고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자료들을 공유하자는 목적이 순수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나도 무명으로 들락거리며 활용하고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비공개라니. 안타깝다. 즐겨 오르던 언덕 위 도서관 하나가 문을 닫은 것 같아서.
함께 나눈다는 것. 당연하다. 그러나 어렵다.
음악소리는 여전히 조용하고 편안하고 -졸린 건 아니고- 귀여운 아기곰처럼 사랑스럽다. 자동차 바퀴 아래로 찬찬 물방울 소리가 오전내내 귓가에 닿는다. 쉼은 복잡하지가 않다. 자잘한 것에 귀를 대고 편안할 수 없게 된 것에는 다만 눈으로 다녀오고 그리고 무채색의 오후를 맞는 일. 단순하다.
저녁 쯤 오랫만에 둘째 아들을 만날 것 같다. 2박 3일 휴가를 얻은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단다. 동해로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저녁밥을 얻어먹을 모양이다. 발효된 빵이 유난히 맛있던 그 피자 하나 주문해야겠다.
2009년 7월,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