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루스 베네딕트<국화와 칼>

미송 2012. 8. 1. 07:31

 

 

 

 

어떤 문화의 자기 훈련은 항상 다른 나라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훈련 방법 그 자체는 잘 알지만, 어째서 저렇게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째서 일부러 고리에 매달리거나, 배꼽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전혀 돈을 쓰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이런 고행에 전념하며, 국외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충동을 제어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나라에 속해 있는 관찰자가 그 방법을 매우 신뢰하고 있는 국민의 한가운데 있을 경우, 오해의 가능성은 최고도에 달한다.

 

미국은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전통적 방법이 비교적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미국은 자기 생애에서 실현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계획이 서 있는 사람은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혼자서 나름대로 자기가 선택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를 훈련하고 있다. 자기 훈련을 하는가 안하는가는 그 사람의 소망, 양심, 혹은 기술적 본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는 축구 선수로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엄격한 규율에 따르거나, 음악가가 될 수련을 하기 위해 또는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일체의 오락을 단념한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그릇된 행위나 경박한 행위를 삼간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특별한 훈련법으로서의 자기 수양 그 자체는, 산수처럼 개개의 경우에서의 응용을 전혀 도외시하고 그것만을 따로 배워햐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런 수업이 미국에서 실시되고 있다면 그것은 유럽에서 온 어떤 종파의 지도자나, 인도에서 고안된 방법을 전수하는 스와미(힌두교 교사)들에 의한 것이다. 성 테레사나 십자가의 성 존이 설교하고 실천한 것처럼 명상과 기도를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수련조차도 미국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일본인은 중학교 시험을 치르는 소년도, 검도 시합에 출전하는 사람도, 혹은 또 단순히 귀족으로서의 생활을 보내는 데 지나지 않는 사람도, 시험을 치를 때 필요한 특정한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그와는 전혀 별개의 자기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시험 공부를 하였다 하더라도, 아무리 검도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예의범절에 빈틈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책이나 죽도竹刀를 곁에 놓고, 사교계에 나가는 것을 잠시 중지하고 특수한 수행을 한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다 신비스러운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자기 훈련에 관한 언어 표현이나 그 관행에 대하여 인생에서의 일정한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어느 계급에 속하는 일본인도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특수한 자제와 극기의 방법에 대한 관념에 기초한 개념으로 자타의 행동을 판단한다. (중략)

 

훈련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든,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는 양심으로서 마음속에 투입된 것이든-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자진해서 받거나 아니면 권위에 의하여 강요되는 훈련에 의하여 사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이다. 당사자는 이와 같이 자신의 소망이 제한되는 것을 불쾌하게 느낀다. 그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 그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래도 반항적인 감정이 생겨난다. 이것은 단지 미국의 많은 전문 심리학자들의 견해만이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세대가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양육될 때의 철학이다. 그러니까 심리학자의 분석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진리를 가지는 것이다. (중략)

 

일본인의 타인에 대한 봉사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은 물론 이러한 상호의무로서, 그것은 남에게서 받은 것에 대하여 같은 양을 변제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계층적 관계에 선 사람끼리 서로 그 책임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자기 희생의 도덕적 지위는 미국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일본인은 이제까지 항상 특히 기독교 선교사의 자기 희생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보여 왔다. 그들은 유덕한 사람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을 자기 소망의 억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일본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당신들이 말하는 이른바 자기 희생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남을 위해 아무리 많은 것을 희생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정신적으로 고매해진다거나, 또 그 보답을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인처럼 정교하고 치밀한 상호 의무를 생활의 중추로 삼고 있는 국민이, 자기들의 행동을 자기 희생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극단적인 의무를 수행하는데 전통적인 상호 의무의 강제력 때문에, 개인주의적인 경쟁이라는 것을 기조로 하는 나라들에서 자칫 일어나기 쉬운 자기 연민과 독선의 감정을 품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자기 훈련의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의 자기 훈련의 관념에 일종의 외과 수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서 이 관념의 주위에 달라붙어 있는 자기 희생억압이라는 부산물을 잘라 내야만 한다. 일본에서는 훌륭한 경기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훈련을 한다. 그리고 일본인의 태도는 브리지를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전혀 희생 의식을 수반하지 않고 훈련을 받는다. 물론 훈련은 엄격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항의 본질에 뿌리 박힌 것이어서 엄격한 것이 당연하다. 태어난 그대로의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능력을 갖지 않고 있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슈요修養)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능력을 획득한다. 이 표현은 통상 이리하여 비로소 인생을 즐길 수가 있다(only so can he enjoy life)”고 번역되고 있다. 자기 훈련은 (자제력이 깃드는 곳)-배짱-를 만든다.” 그것은 인생을 확대한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p279~286 자기수양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 문화 연구서. 전후戰後에 일본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때문에 1944년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집필하였다고 한다. 국화와 칼은 온화하고 유순하면서도 동시에 호전적이고 잔인한 이중성을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