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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술적 사실주의’

미송 2012. 8. 23. 22:53

 

Salvador Dali '십자가형'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술적 사실주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이야기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용어가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이 개념은 아마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탄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종종 우리나라에서 ‘환상문학’과 동일시되는 경향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어두운 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종래의 ‘환상문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보르헤스의 환상문학과도 매우 큰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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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인 소설 재료를 사용하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마르케스는 ‘환상적’ 혹은 ‘마술적’이란 용어를 거부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자기 자신을 ‘리얼리즘 작가’로 규정한다. 마르케스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매일 일어나는 일상사와 경제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민중 신화, 신앙과 민간요법까지도 포함한다. 즉 ‘사실’만이 아니라 그런 사실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거나 믿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콜롬비아의 대서양 해안의 삶은 민간전설과 미신으로 점철된 곳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르케스가 자신의 예술 속에서 포착하여 사용하는 대상 중의 하나이다. 이런 것을 사용하면서 ‘이성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이 항상 강요하려고 했던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다룬다. 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품 속에서의 ‘환상성’은 바로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인들의 산 경험인 ‘현실’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마르케스의 특허품처럼 여겨지는 ‘현실’과 ‘환상’의 융합인 ‘마술적 사실주의’는 어떤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되는가? 이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수많은 상상적인 환상을 엿볼 수 있다. 가령 바닥에서 떠오르는 신부, 하늘로 승천하는 미녀 레메디오스, 피가 흘러내려 온 동네를 지나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 가는 모습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은 문학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민간 신화, 고대 서사시, 중세 로맨스, 동화, 고딕 소설, SF소설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이런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일상생활 속에 완벽하게 통합됨으로써 사실적인 효과를 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냥 ‘환상적’ 요소로 존재하는 종래의 문학과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점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용하는 또 다른 비현실의 차원은 과장(誇張)을 체계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과장된 요소들은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명확한 사실 같으며, 심지어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이런 효과를 “당신이 어느 핑크색 코끼리를 보았다고 말한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날 오후에 날아다니는 17마리의 핑크색 코끼리를 보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그럴 듯해 보일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의 과장된 요소들은 거의 숫자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부엔디아 대령의 서른 두 번의 봉기, 4년 11개월 2일간 지속되는 폭우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날아다니는 카펫과 인간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은 실제로 마술적인 것이다. 이 작가의 마술적 재능은 바로 이런 마술적 요소라는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소설적, 물리적 상황을 적절히 창조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가령 니카노르 레이나 신부는 뜨거운 초콜릿 한잔을 마실 때마다 바닥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상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음료가 신부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니카노르 신부는 이런 묘기를 성당 건축을 위한 모금 방편으로 사용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성을 억압적인 교회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 신부를 통해 신화적 요소의 탈신비화를 추구한다.

 

사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라틴아메리카적인 문화 특성이 융해되어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추상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즉 텍스트 속의 사건들은 한 라틴아메리카 작가의 기발함에 의해 변형된 세계 보편적인 경험이나 진리라고 인식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용어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여러 상이한 글쓰기와 여러 정치적 관점을 붕괴시키면서 단 하나의 도피주의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술적 사실주의는 구미의 비평가들과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무의식적인 공모 관계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유럽과 미국의 비평가들은 상상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라는 다양한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자신들의 ‘고갈된 문학’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며, 몇몇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부당하고 폭력적인 라틴아메리카 현실에서 벗어나 글쓰기에만 안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현실 그 자체를 환상적이라고 수용하는 관점(보르헤스, 코르타사르의 경우)과 신앙이나 신화, 혹은 허구적 인물의 환상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런 것을 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탈신비화시키는 관점(룰포, 로아 바스토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엄격한 의미로 사용하자면 후자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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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마술적 사실주의’는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추진력임과 동시에 라틴아메리카 현재 역사의 ‘지칠 줄 모르는 창조의 샘’과 동일한 궤를 형성한다. 이러한 ‘마술적 사실주의’의 특징은 1982년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행한 15분짜리 연설문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젤란과 함께 항해했던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지구로의 첫 여행’이라는 항해일지를 언급하면서 연설문을 시작한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피카페타는 ‘등에 배꼽이 있는 돼지들을 보았으며, 암컷이 수컷의 등위에 알을 품는 다리 없는 새들과 주둥이가 숟가락 같은 혓바닥 없는 펠리칸들, 노새의 머리와 귀를 하고 낙타의 몸과 사슴의 다리, 그리고 말처럼 울부짖는 짐승’과 같은 기괴한 것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 연설 중에 그는 이런 것보다 덜 상상적이지만 불확실한 사실을 떠올린다.

 

지난 11년 동안 2천만 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은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수를 상회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정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은 거의 1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게 하려는 소망으로 거의 20만 명에 가까운 남녀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조그만 세 나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음씨가 극진하고 돈독한 전통의 나라였던 칠레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백만 명이 조국을 버리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했거나 망명한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 보다도 더 큰 인구를 가질 것입니다.

마치 기억 상실증과의 전쟁을 벌이는 듯이 이런 말을 한 이후, 그는 이러한 ‘무질서한 현실’속에서 콜롬비아의 ‘시인과 거지들, 음악가들과 예언자들, 전사(戰士)와 악당들’은 현대 문학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장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했다고 지적한다. 즉 “이 불행한 현실 속에서 사는 모든 창조물들은 상상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최대의 적은 우리의 삶을 믿게끔 만드는 전통적 수단이 불충분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현실의 출처가 문학의 모든 것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작가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언어로 이런 암실에 빛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핵심을 지적한다. 이런 마술적 사실주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우르술라나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살았던 ‘조그만 유토피아’를 제공했으며, 이런 유토피아는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서 삶을 긍정하는 허구적 질서였던 것이다.

 

1967년에 발표된 <고갈의 문학>에서 존 바스는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을 통해 당시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던 미국 문학이 나갈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13년 후에 <고갈의 문학>에 대한 대답이자 수정판인 <소생의 문학>에서 존 바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가장 칭찬할 만한 작품이라 일컬으면서 ‘솔직함과 꾸밈, 사실주의와 마술과 신화, 정치적 열정과 비정치 예술성의 종합’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이 ‘인간적으로 사려 깊고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스토리텔링 예술의 거장’이라고 지적한다.

 

이렇듯 미국 및 유럽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세계 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모두 환상과 현실의 점묘點描한(?) 배합점을 나름대로 찾는다. 보르헤스는 차갑고 지성적이며 박학함을 통해 이성적으로 환상을 사용한다. 반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불가해한 현실의 신비를 포착하면서, 작가의 사회적 예술적 의무로써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사한다. 이렇게 두 작가가 상이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작가가 현실과 환상의 이해를 법칙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예술 세계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가들의 환상과 마술은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다. 보르헤스이 작품은 로브 그리예, 데리다, 푸코, 블량쇼, 주네트로 대표되는 프랑스 비평가들을 비롯하여 존 바스, 도널드 바셀미, 토마스 핀천, 커트 보네거트 등의 이성적 환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반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토니 모리슨, 존 니콜스, 윌리엄 케네디, 로버트 쿠버, 레이먼드 페더만, 샐먼 루시디 등처럼 현실과 환상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권력의 사회성을 해체하려는 작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우리 문학은 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환상문학에 대해 눈을 돌리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배합점을 찾으면서 세계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도 ‘지칠 줄 모르는 창조의 샘’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을 얼마나 허구적 세계로 융합할 수 있으며. 그에 걸맞는 언어가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 2002, 송병선 지음> pp 101-108

 

타이핑 - 채란

 

자주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은 말. 환상적 리얼리즘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니 하는 소리. 이 이분법적 개념 정리에 대하여 나는 흥미가 떨어진다. 굳이 나의 주관으로 말한다면, 보르헤스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두 작가는 그들만의 렌즈와 정서의 틀을 소유했다, 고 본다. 고로 환상이나 마술이란 평론가들의 수식어는 작가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에겐 리얼리즘만 있었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자기만의 개성 혹은 렌즈로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했을 뿐이다. 리얼함을 더 리얼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그것만이 자기가 속한 비참한 세계에 대하여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었을 터. 로망이니 풍자니 과장이니,  읽는 자들이 마술이니 요술이니 환상이니 말을 붙이지만 작가에겐 다만 현실만 있었을 것이란 내 생각이다. 백해무익까진 안 가겠으나 평론가들의 개나발을 다 믿을 필요는 없다. 잠시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렌즈를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놓은 적나라한 현실과 비극적인 세상을 읽으면 그 뿐! 그것이 안이한 학습보다 백배 유익함을 얻는 지름길이다.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한 편의 작품은 수천 편의 평론에 빗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평론의 무용론이 아니라 작품을 읽자 주의를 말함이다. 나는 아직도 <백년 동안의 고독>을 구전으로만 알고 있다. 주제파악이 역시 모든 장르의 기본이자 목적임을 알면서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