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공백이 뚜렷하다>
공백이 뚜렷하다! 시 제목 참 멋지다. 뚜렷하다는 건 좋은 것, 이렇게 말하면 논리적으로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겠지만, 공백空白이 그러하다는 데에 도드라진 이의를 제기할 건 못된다 싶다. 공백이든 滿白이든 뚜렷한 건 역시! 1949년 생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30년 책과의 전쟁을 고백했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란 에세이를 통해 은둔의 달인이었던 그가 '책과 함께 한 인생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의 고민 중 가장 큰 고민은 망각(문학적 건망증)이었다. 읽고 밑줄까지 쳤는데 나중에 펼쳤을 땐, 영 생소하고 낯설더란 고백.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문학적 줄거리나 주인공들은 대체 몇이나 될까 하는...그의 고민은 곧 나의 고민이었다. 독서와 글쓰기의 질량을 따져 비교하면 물론 비교가 안 되겠지만.... 암튼, 늦여름부터 예감했던 얄팍한 달력 소리와 월담하듯 넘실댈 12월 캐롤소리가 피부에 와 닿는 요즘이다. 내 주변에는, 다이어리 역할을 해 주는 탁상달력뿐이 없지만 시인의 벽걸이용 달력에 향수와 공감이 인다. 달력을 떼어낸 자리(공백이든 만백이든)는 상징성을 지닌 삶의 오브제objet일 것이다. 어두운 전체에서 쏟아져 나와 읽는 순간 유성처럼 빛나고는, 곧 다시 망각이라는 레테의 강으로 깊이 가라앉던 낱말들, 내가 무척 편애했던 문학들, 이젠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 저자들과 표제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내고 있다. 저 앞에 누구처럼....나도 나를 살짝 달래고 있다. 순간, 詩가 말한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해’ .... 어쨌든, 내용은 잊었지만 의미는 생생하게 뇌리를 감도니, 空하다... 아니, 卍한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