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아름다운 21세기의 프로테스탄트

미송 2012. 12. 15. 06:25

아름다운 21세기의 프로테스탄트

 

 

1

요새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하루에 이삼천 원을 벌려고 폐지를 수집하는 할머니의 손끝도 많이 곱아 보입니다. 길 가다가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눈에 띄면 문득 걸음을 멈추기도 합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멋쩍은 표정으로 “할머니 얼마나 모았어요?”하고 말을 건네고 항상 듣는 대답이지만 “에유, 얼마 못 모았어요.”라는 말에 새삼 고개를 끄떡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나와의 거리를 재보기도 합니다. 연세가 70중반이라면 나와는 20년의 거리지만 나이는 들수록 더 빨라지니 손끝에 닿을 듯합니다. 눈치로 봐서는 홀로 사는 분 같으니 피곤한 몸 이끌고 돌아가면 몸 하나 뉘일 만한 조그만 방, 정부미로 지은 텁텁한 맛의 밥, 반찬 두세 가지, 이것이 할머니의 모두일 것 같습니다. 연료비를 아끼려고 보일러 대신에 전기장판 켜놓고 두터운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기도 하겠습니다.

 

할머니의 소원은 무엇보다도 성한 몸으로 일어나 폐지를 수집하러 또 나가는 일이겠습니다. 언제는 할머니가 알루미늄으로 된 선반을 힘겹게 떼어내고 있었습니다. 지나던 내가 떼어주겠다며 알루미늄 파이프를 쇠로된 뼈대에서 뽑고 또 발로 쿵쿵 밟아 반 토막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빨개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습니다. 저렇듯 빨개진 얼굴도 할머니에게 있었는가? 제 가슴까지만 오는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이 젊었을 때는 얼마나 예뻤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나 젊었던 시절은 있었을 테니, 할머니의 그늘진 이마와 눈매, 조글조글한 입술과 뺨을 내려다보며 갈라진 거북이 등 같은 주름살을 헤쳐 봤습니다. 그 옛날에는 아담한 몸매에 예쁜 처녀의 빨개진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도 나이에 따라 다른 모양입니다. 나는 아직 젊었기에 할머니의 처녀 시절을 상상했지만 저쪽에서 오던 예순 후반의 누님은 “할머니, 건강하세요?”하는 질문을 대뜸 던지더군요.

“네네, 괜찮아요.”

“그저 몸만 성하면 최고에요.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요?”

“그럼요, 호호, 아직은 아픈 데가 없으니 좋아요.”

“그래요. 그래요. 돈 보다는 운동 삼아 폐지도 수집하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간병인 생활을 몇 년간 했던 누님이기에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알고 던진 질문이겠습니다.

 

바람이라도 지나다가 툭 건들이며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 한번 누우면 영원히 못 일어날 것 같은 사람들, 건들건들 대는 생명 하나가 얼마나 눈부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에 신(神)이 깃든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만 종교단체는 안 믿는 습성이 있답니다. 아무리 종교의 교리가 훌륭하고 스님이나 목사의 설교가 대단하더라도 할머니가 떼어내려고 애쓸 때 힘을 주던 손길 하나만도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잘 간수하라는 모든 말씀이 엉뚱하게 남을 지배하려는 탐욕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실의 종교계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저항입니다. 그래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조직화되고 집단화 된 종교단체에게 나는 늘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어느 시대건 핍박받는 사람들의 은총입니다. 신은 항상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자를 통해 오기에 누구에게나 구체적인 신이요, 제각각의 신이요, 한번 누우면 내일은 못 일어날 것 같은 머리맡의 신이기에,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놀러 다니지도 않고 손뼉을 치라며 마이크를 잡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종교적인 광기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신이 사방에 널렸습니다. 정작 신은 혼자고 성자도 역시 혼자였으며 석가모니나 예수는 고행을 했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세력에 몰두하여 패거리로 몰려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듣기에도 섬뜩한 전투와 승리, 성스런 전쟁, 악마의 멸망을 외치며 저주를 상대에게 퍼붓고,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종교를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니 세상은 우상으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신자들도 역시 신보다는 우상에게 매달리고, 제멋대로 교리의 아무 구절을 따다가 제멋대로 해석하여 상대를 이단으로 몰고, 스스로 선택 받았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신은 항상 자기편인 줄 압니다. 그러나 신은 늘 공정하지 않을까요? 신에게는 편애가 없어 한쪽 편만 옳다고 영원히 손들어 주지 않을 듯도 합니다.

 

세금도 내지 않겠다, 사학재단에서 물러서지 않겠다, 국립공원에서 사찰의 땅은 빼 달라, 등등 종교계는 굳건한 성을 독차지 한 것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세금을 내면 어떻습니까? 국민 모두를 위한 투명한 예산과 그 집행이라면 일부러라도 내야 되지 않을까요? 돈이야 풀어놔주건 말건 우리나라에서 빙빙 돌게 마련이고, 나가봐야 지구 안에서 돌아다닐 뿐이지 저 우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학법은 그 운영을 투명하게 하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이 피땀 흘려 벌어서 낸 학자금의 흐름은 외부에서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불교재산도 역시 공공성을 띈 재산이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제시대에 도입된 등기제도에 의해 지표에 선을 그어 누구의 것이라고 정해져 내려왔지만 알고 보면 특정한 집단이나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종교가 소유를 만나면 타락되게 마련입니다. 종교가 권력과 손잡으면 지옥을 만들게 마련입니다. 조금만 역사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절을 버렸지만 석가모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교회를 멀리하지만 예수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저 이외에도 아주 많을 듯 합니다. 특정한 종교도 아닌 전체 종교를 상대하여 의문을 품으며 혼자 고민하는 이 사람들을 저는 <아름다운 21세기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부를 나누기 보다는 가난을 함께 나누어라.”하고 외친 마리아 테레사 수녀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행복을 나누기보다는 불행을 함께 나누지 못해” 시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2

아래의 사진은 1994년 풀리처상을 수상한 <굶주리는 수단 소녀>라는 케빈 카터의 작품입니다. 아사 직전에 엎드려 있는 소녀의 뒤에 살찐 독수리가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진작가인 케빈 카터는 사진촬영 후에 이 소녀를 난민구호소로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진작가의 냉철한 눈으로는 이 소녀가 단순한 피사체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서울 중심에 자리 잡은 대연각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68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 고층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서른 명이나 넘었지만 낙하는 장면만 사진에 찍혔지 구하려고 뛰어든 사진작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에 사진작가들은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참상을 널리 알리려는 그들의 노고도 가볍게 볼 수는 없겠습니다.

 

 

저는 독수리밥이 되기 직전의 수단 소녀나 불길을 피하여 고층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재산이 많고 명예로운 자나, 가난하거나 못된 짓을 일삼는 자나, 행복한 자나 불행한 자나, 종교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리는 마차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죽음의 형태만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위기 속의 인간이라는 뜻과도 통할 듯 합니다. 가끔 저는 일부 종교지도자나 신도들이 사진작가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말씀과 손가락질만 있지 행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수단 소녀에게는 한 줌의 식량이 생명이고 고층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받아 줄 손이 구세주입니다. 사진이 상을 받느냐 혹은 특종기사감이 되느냐는 그 위기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신음하는 자를 구경거리로 삼는다면, 한 발 더 나아가 신음하는 자에게 영혼을 팔아 그 뼛속을 빨면 신이 분노할 일이겠습니다. 물론 이런 말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의 예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도들이 눈에 띄게 적어진다는 기사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느 날 보니깐 믿었던 모든 것이 우상이었는가요?

 

길거리에서 한국말이 유창한 미국인을 만났었습니다. 그는 몰몬교전도사였는데 나에게 몰몬교를 믿으라고 하더군요. 무시하고 지나쳐 얼마쯤 가니깐 이번에는 무슨 교회에서 나왔다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더군요. 지하철을 타니 어수룩한 중년 남자가 또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세상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나무아미타불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냉정히 따지면 문자를 습득한 지식층이 따로 있던 옛날이나 중세시대에나 통할 수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인터넷 검색 하나만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 구경할 수 있고, 그 교리를 배울 수도 있는 시대입니다.

<한양 땅의 거지보다 목사들이 더 많은> 이유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밤에 높은 빌딩에 올라서 아래를 굽어보면 그 많은 십자가들, 마치 서울이 모두 공동묘지 같습니다. 시골 구석구석에도 십자가가 안 박힌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축복 받은 땅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신도들이 적어져 간다면 그 십자가도 하나 둘씩 쓰러져 갈 테니, 이건 또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녀사냥을 일삼는 중세교회에 반기를 들어 프로테스탄트가 출현했듯 오늘의 교회도 역시 새로운 프로테스탄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변하면 종교도 변해야 하는데 아직 한국교회는 아주 먼 옛날의 그 자리에 안주하여 고집만 피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정신없이 휘감았던 불교는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해 몰락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이상한 일은 종교가 비대해지면 꼭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초기종교는 늘 순교자를 생산하는 핍박으로 시작되다가 사방을 평정하고 나면 이제는 자기들끼리 패 갈라 싸움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들더군요. 저는 이럴 때 꼭 구약성서의 바벨탑을 떠올리곤 합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다시 뭉치지 못하게 언어를 다르게 했다는 신의 의지는 인간들 사이에 불변하여 흐르는가 봅니다. 이는 종교가 커질수록 더욱 겸손 하라는 교훈을 가져다줍니다. 신앙이 돈독할수록 더 깊이 머리 숙이라는 말이겠죠.

 

저는 <아름다운 21세기의 프로테스탄트>를 기다립니다. 아직은 사진을 찍어 상을 타든가 특종기사를 내보낼 때가 아닙니다. 종교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서 지금도 세상은 불국토가 되지 못해 석가모니는 고행 중이며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굶주린 소녀에게 독수리의 밥이 되지 않게 식량을 주고, 고층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구하려 사진기를 집어던지고 뛰어가는 사진기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기다리는 밤입니다.

 

3

성자(聖者)에게는 프로필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늘의 자식이요, 대지의 싹이요, 우주를 가는 발걸음입니다. 이는 참으로 평범하여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합니다. 언젠가 저는 혼자 잠자다가 천식이 급하게 발작했습니다. 얼른 병원에 가려고 몸을 일으켜 한 발을 떼는 순간에 그만 푹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꼭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고 몸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았기에 발걸음조차 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벽에 그런 증상으로 질식해 죽는 경우가 있다는 의사의 말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가고, 며칠간 잠을 못 자며 헉헉거리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제대로 숨이 터졌습니다.

 

위기를 넘기자 정작 나보다도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옆자리의 환자가 더욱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20대 후반으로 뵈는 이 환자는 내가 얼굴이 까맣게 탄 채 들어와 숨을 몰아쉬는 며칠동안 잠도 못자고 나만 주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깜빡 잠들었다가도 혹시 내가 죽어있지나 않을까 퍼뜩 깨어 나를 둘러보고, 또 그렇게 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지냈던 것입니다.

“어휴, 아저씨가 꼭 죽을 것만 같아서 혼났어요.”

비로소 안심했는지 한 마디 하고 깊은 잠에 빠진 그 청년을 바라봤습니다. 자기도 아프면서 옆사람이 죽을까봐 혼났다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당시 사십 중반으로 뵈는 여의사가 저를 치료했는데 하루에 두 번씩 회진하는 태도가 무척 진지했습니다.

“이제 고비는 넘겼거든요. 보름 정도만 더 계시다가 퇴원하면 될 거예요.”

청진기를 접으며 말하는 의사의 표정이 꼭 자기의 병을 고친 듯이 환했기에 저는 갸웃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10년 이상은 의사노릇 했으니 그깟 환자 하나 고쳐서 내보내는 일이 그다지 기쁠 일이겠는가, 매일 환자에게 시달려 진력도 났을 텐데 내가 뭔 대수라고 그렇게 기쁜 표정을 보이는가, 이런 생각 뒤에는 의사인 제 친구의 말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방도시에 있는 병원의 내과과장으로 근무했었는데 하루 종일 환자에게 시달리다보니 나중에는 기계가 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환자는 환자대로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고, 자기는 자기대로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하고, 특히 지친 오후가 되면 환자 말씀 따로, 자기 말씀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될 때에 의료윤리 지침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열정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료인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생활인으로 변해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천식환자에게는 극약이지만 저는 담배를 피웁니다. 물론 병원에 실려 가기 전날에도 담배를 피웠습니다. 고비를 넘기고 숨통이 좀 터지자 슬슬 담배 생각이 나더군요. 버릇이란 나이를 막론하고 철부지 같아서 야단맞을 때는 꼼짝 못하다가도 틈만 나면 얼굴을 꼭 내밉니다. 잉겔병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복도를 오락가락 하더니 사람이 안 다니는 계단까지 발길이 가고 말았습니다. 한적한 계단은 환자나 사람들의 흡연실로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여의사는 저에게 명령하듯이 금연을 당부했기에 의사나 간호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담배 한 대 달라고 내미는 손길에 순순히 다른 사람이 내민 담배가 쥐어졌습니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이렇게 금붕어처럼 뽁뽁 들이마시고 훅훅 내뿜는데, 마침 계단을 오르던 여의사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순간 여의사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아왔습니다.

“담배가 천식환자에게는 독약이라고 분명히 말했죠?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죽는단 말이에요.”

별안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파르르 떠는 여의사의 말에 그만 담배를 바닥에 뚝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퇴원할 때까지 저는 얼굴을 들지 못했고, 여의사는 회진 올 때마다 마치 제 자식 감시하듯 담배를 피웠었냐고 꼭 물어보고, 금연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염려와 배려에서 성자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스님이나 목회자들 보다는 평신도들에게서 강한 종교적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새벽 기도하러 겨울을 뚫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 쌀을 머리에 이고 가파른 산길 올라 절을 찾는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산 속에 자기만의 정성처를 마련하여 촛불 켜놓고 엎드린 사람들, 또한 깊은 밤에 홀로 묵상에 잠긴 사람들, 이들은 아름답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건 가족을 위하건, 아니면 많은 사람들을 위하건, 소망을 가지고 하늘아래 엎드린 모습이 참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저와 친한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염불을 참 잘했기에 주변 사람들이 염불스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한 두 시간씩 불경도 안 보고 염불을 외우는 게 신기하여 언젠가 물었습니다.

“어찌 그렇게 긴 불경을 다 외우고 계세요?”

“그게 말씀이에요. 사실 염불을 외우다가도 잘 까먹기도 하거든요. 어떤 때는 졸음이 마구 쏟아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뭘 주절거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사실 제가 개발바닥 소발바닥하고 외워도 신도들이 알아듣지는 못하죠. 하지만 진짜 염불을 외우는 사람은 불경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기도하는 신도들이에요. 그들은 오직 정성으로 기도하거든요. 사실 저는 땡초라고 할까...... 목청만 좋으면 뭐해요? 매일 이 짓을 하다보니 그들보다 매사에 정성이 부족하게 되는가 봐요. 미안할 때가 많아요.”

 

어리석게도 저는 지금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을까봐 잠을 설쳤던 옆자리의 환자와 여의사도 잊지 못합니다. 이들은 순간이나마 저를 구체적으로 염려해 주던 사람들입니다.

성자(聖者)란 멀리 있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늘 곁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처럼 뺀질뺀질 말을 듣지 않는 탕아의 곁에 있습니다. 담배를 피울 때에 가끔 그 성자의 목소리, 바로 여의사의 칼날 같은 질책이 귓가를 맴돌기도 합니다.

 

2007, 이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