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정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진이정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차창룡 시인
진이정 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내겐 추억 없다 / 찰나 찰나 연소할 뿐”(「추억 거지」)이라는 형의 시구처럼 추억이란 원래 없었던 것일까? 서서히 사라져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그 없는 추억들을 주워담아 본다. 그 기억의 파편들에도 아트만이 존재할까? 아트만이라! 진이정 형의 첫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에 실린 시 중에서 「아트만의 나날들」은 특히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발랄하면서도 깊은 시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근본 원리이다. 그것은 절대이며 전체이기 때문에 어떠한 말이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브라만을 말로 혹은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유지의 신 비쉬누와 파괴의 신 쉬바를 만든 것이니, 브라흐마와 비쉬누와 쉬바는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브라만은 달리 말해 신성神性이라 할 수 있다. 신성은 모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속에 들어 있다. 이렇게 각 개체 속에 현존하는 신성(브라만)을 아트만(참자아)이라 한다. 따라서 브라만과 아트만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진이정은 이러한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를 참으로 재미있고 서글프게,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체험 속에서 시화하고 있다.
코끝에선 약 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 '아트만의 나날들' 에서
약 냄새란 미군 병사의 마약 냄새인 듯하다. 외삼촌의 술주정과 미군 병사의 약 냄새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도의 함피에서 숙소 주인이 내게 은밀히 물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원하십니까?” ‘특별한 것’이란 분명 마약이었다. 나는 거절했지만, 몇몇 외국인은 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화자의 외삼촌이 곧 숙소 주인과 비슷한 사람일까? 물가가 비교적 싼 외국에 가서 마약을 하는 이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미군 병사의 심정과 어떻게 다를까? 이 시의 첫 구절이 “약 냄새, / 돈은 슬퍼라”인 것으로 보아, 진이정에게 ‘약 냄새’와 ‘돈’은 동의어이다. 마약의 대가로 받은 돈도 슬프고, 제정신을 잃고 돈을 뿌리면서 뿜어내는 약 냄새도 슬프다. 그런 풍경은 자본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나라들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외삼촌은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고 죽었다. 여기서 박카스는 아무래도 독약이나 수면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약 냄새’의 약은 독약이나 수면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건 /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라는 구절 속의 박카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약이라기보다 외삼촌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이겠지만, 그런 구별이 특별히 의미있는 것은 아니겠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외삼촌의 ‘생생한 아트만’을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외삼촌의 ‘아트만’은 죽음을 통해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아트만은 ‘생명’과 동의어가 된다. 그 생명은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이다. 그 구체성이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니, 그렇다면 브라만은 죽음이란 말인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생명 있는 것의 궁극적인 원리이다. 그렇다면 브라만이 ‘죽음’인 것이 맞다. 진이정의 시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이 삶과 죽음으로 교묘하게 나누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아니, 서글픈 일이다. 왜냐하면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것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부조리한 현실이 있어 그러한 진리도 무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인은 ‘슬픔’의 의미를 깨닫는다.
봉지쌀의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 '아트만의 나날들'에서
진이정의 역설은 여기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진리가 무력해진 상황이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이 범아일여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현상이 슬프다는 것이 진이정의 역설이다.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범아일여’의 사상에 따르면, 우주의 근본 원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 서글픈 우주의 근본 원리가 다름 아닌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상을 수놓는 온갖 아트만이 슬픔의 화폐(자본주의 시대의 아트만은 결국 화폐이리라)인 이상,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라는 말씀이 어떻게 위안이 되겠는가. 이러한 인식의 토대 아래 화자는 “죽으면, 그렇다…/그냥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사법계事法界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전자야말로 범아일여라는 법칙을 뒤집고 뒤집어서 도달한 결론으로, 진이정의 “죽으면, 그렇다… /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진이정의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구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아트만의 나날들' 끝부분
참자아가 없어진 마당에, 참자아의 집인 인생이 꿈이라는 것은 확실히 헛된 비유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의지할 경전(우파니샤드)은 이제 현실뿐이다. ‘빵구 나오시’ 가게의 몽키스패너 같은 구체적인 물건만이 경전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아닌 깨달음이 왜 가슴 아픈 것일까? 왜냐하면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종교적·철학적인 신념도 물리적인 폭력과 물질적인 결핍 아래서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는 화자는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박카스’를 사먹기 위해 “이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브라만을 믿고, 범아일여를 믿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진이정의 사유가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진이정이 범아일여를 믿었기 때문이다. 범아일여를 믿고 공부한 결과, 범아일여라는 사상이 세상을 결코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한낱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범아일여를 믿지 않았거나, 끝까지 범아일여를 절대 진리로 생각했다면, 이런 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이정이 범아일여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일차원적인 반응이다. 진이정의 부정은 결코 절대적인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자는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와,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위안받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는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 /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라고 말한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트만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아트만이란 참자아이므로, 참자아가 무너졌다면 나는 이제 없는 것이란 생각 때문일까? 그런데 화자는 자신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각성’을 강조한다.
내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각성은 나가르주나의 중관中觀사상에 따른 것이리라. 결국 범아일여를 부정하는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바탕으로 진이정의 사유가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몸으로 느끼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진이정은 그 각성이 뒷골을 쑤셔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은 쉽지만 깨달음의 체화는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사유는 실천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넘어서는 구체성을 띤다.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결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는 것에도 없다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觀有無品」)라고 말했다. 따라서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 모두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데, 시인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생각에 더 집착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동안 ‘있었다’나 ‘있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는 그 생각을 토대로 바로 시적인 기지를 발휘한다.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성찰보다는 시적인 사유를 펼치는 진이정은 중관사상 속에서 중관사상의 진리로부터 가볍게 빠져나온다. 삶과 죽음이란 따로 없다는, 따로 없으므로 삶에도 죽음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나가르주나의 설법은 지극히 옳지만, 그것이 옳다 해도 실존하는 인간의 괴로움 또한 엄존하는 것이다. 엄존하는 괴로움을 여읠 수 있는 방법을 나가르주나는 가르치고 있지만, 그 방법 또한 사실 브라만이고 아트만이고, 범아일여일 뿐이다. 칼과 배고픔이 먼저 우리의 ‘없는 감각’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감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우리의 존재가 원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면, 죽어도 아픔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이니, 아픔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따라서 죽음도 죽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슬픔의 드링크’를 통해서만 위안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의 결론 아닌 결론이다. 결론 아닌 결론이라 한 것은 이 시가 진정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결론 아닌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이정의 이런 시적 사유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중적 전위주의’를 주장하면서 대중문화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시인에게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면서 진이정은 ‘대중’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시인들이 대중들의 구미를 따라가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의 관심은 대중들의 가벼운 흥미가 아닌, 역사와 우주의 진리를 현실 속에서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결코 무겁지 않게 가볍게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문화론은 한 마디로 ‘대중적 전위주의’였다.
1989년 유하·박인택·함민복 형과 함께 동인을 결성한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서 새로 써온 시를 읽고 합평회를 열었다. 새로 나온 시집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진이정 형의 원고는 참 경이로웠다. 주로 원고지 뒷면을 사용했던 것 같다. 빽빽하게 적어내려간 긴 시가 원고지 한 장에 다 들어갔다. 가령 「진창」 같은 시가 원고지 뒷면에 쏙 들어갔다고 생각해보라. 한자 한자 또박또박 적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 깔끔한 필치 속에는 촌철살인의 풍자가 들어 있고, 한없는 슬픔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슬픔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형의 시 속에 「아트만의 나날들」 같은 복잡한 사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사유는 현실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은 착각을 안긴다.
형의 아픔도 그랬다. 군대에서 제대해 돌아온 후 형은 동인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전화하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형, 몸이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아니, 괜찮아. 감기에 걸려서 어제 약국에서 약 사다 먹었어.”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늘 가볍게 얘기하는 버릇 때문에 우리는 까마득하게 속았고, 형은 짧고도 긴 투병생활을 일찍 마치게 된 것이었다.
형은 언제나 그랬다. “시집 준비 잘하고 있니?” “네 시가 많이 좋아졌더라.” 동인들의 시세계를 열심히 점검했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동인들이 대부분 시집을 출간했는데도 형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집을 내지 못했다.
형과 이별한 지 10년, 이제 추억은 저만치 사라져가고 있다. 추억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족해, 나는 이번에도 형과의 추억을 얘기하지 못했다. 나의 바람은 형과 마주 앉아 「아트만의 나날들」이라는 시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을 나는 여기에 적었다. 형이 어떤 대답을 해올는지?
이제 형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할 때다. 객관적으로 형의 시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믿는다. 허수경 선배는 독일에서도 진이정 형의 시를 읽고 있었다. “빛이 좋은 날을 골라 쓸모 없다 싶은 책들을 골라내어 버린다. 짐이다, 싶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오래된 여행기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유행일 때 사놓은 심리학책도 있다. 책을 다 버리더라도, 혼자 생각한다. 버릴 수 없는 책이 있을까? 그 가운데 하나, 가난한 벗의 시집 하나, 이런 시가 들어 있는 시집 하나.”(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문학동네, 107쪽)
인생 혹은 거품의
눈물,
그 생애에 걸친 소금기
눈물은 왜 바다처럼 찝찔해야만 할까
폭풍우, 폭풍우도 없이!
- '눈물의 일생' 전문
차창룡 1966년 전남 곡성 출생.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 발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문학과지성사, 1994).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민음사, 1997), 『나무 물고기』(문학과지성사, 2002) 등.
진이정 1959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경희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1993년 타계했다. 시집으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1994)가 있다.
애수의 소야곡 / 진이정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남인수와 고복수의
팬이던 아버지는
내 사춘기의 송창식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나는 또 누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부터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즐기려고 애써 왔다
허나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밤이 자주 찾아오기에
나는 두렵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해한다, 라고 똑 떨어지게 말할 날이
백발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추억이던 왜정
때의 카페와 나의 카페는
그 철자만이 일치할 뿐,
그러나 그런 중첩마저, 요즘의 내겐 소중히 여겨진다
아버지의
카바레와 나의 재즈 바는
그 무대만이 함께 휘황할 뿐
그러나 나는 사교춤을 출 줄 알았던
당신의 바람기마저도 존중하게
되었다
어쩌다 알게 되었지만, <바>라는 건 딱딱한 막대기일 따름,
난 그 막대기 너머, 저어 피안으로 가기를
꿈꾸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의 꿈을 알지 못한다
우린 색소폰의 흐느적임과 장밋빛 무대만을 공유할 뿐,
나는 그의 꿈을
끝내 넘겨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어
꿈이 빠져버린 그의 애창곡이나 듣고 있을 뿐,
허나 난
온몸으로 아,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아
남인수와 송창식을 서둘러 화해시킬 길을 찾는다
아니 억지로, 억지로 화해시키려 한다
가부장의 달빛만 괴기한, 이 이승의 쓸쓸한 밤에
아버지를 이해하는 게 왜 이리 두려운 일인지
잃어버린 그의 꿈이 왜
이리 버거운 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