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버스가 옛날에 살던 동네를 지나가는 동안>
버스가 옛날에 살던 동네를 지나가는 동안 / 박형준
그건 처연했던가
거미줄보다 빨리 철거당하곤 하던
거리의 집들
여름이 미처 오기 전에 물에 잠기던,
방에서 물이 솟던,
새벽에 잠을 자다가 구석에서
시멘트를 뚫고 올라오는 물을 분수처럼
바라보던,
물방울들
물방울들
물방울들
달이 씨앗처럼 부풀던
방울들
방바닥에서 사이다가 솟구쳤다고 외쳐라도 볼걸
흠뻑 젖은 런닝구 차림새로
방구석에서 떨던 새벽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
버스가 옛날에 살던 동네를 지나가는 동안
방울방울방울
방바닥에서 솟던 물방울들
차창 밖에 울창하게 쑥쑥 자라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솟구친 물방울의 나무들
우연히 만나도
이제는 반갑게 만날 수 없는
차창 밖 빗소리 속
차갑게 굳은 분수들
그건 처연했던가.
<실천문학> 2012년 겨울호
춥고 쓸쓸하고 처량하고 슬픈 건 70년 대 거리의 집들일까,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차갑게 굳은 분수들일까. 아마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란 글씨를 쓸 수 있기 전, 내 유년의 기억 속에도 저런 집은 있었을 거다. 아니 저런 집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 양철지붕을 때리던 낭만의 빗소리까진 모르겠고(그때 내 나이 너무 어려서), 그 집 천장에선 쥐들이 기승을 부리듯 마라톤을 해댔고, 가끔 방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부지깽이를 든 아빠의 손을 피해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아나곤 했던, 지금은 추억처럼 재밌고, 떠올릴수록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해진 그 집. 어디가야 그런 집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실이 더 아득해서 처연하다. 처량하기만 했다면 시인은 왜 자꾸 가난했던 기억을 떠올려서 자신을 쥐어뜯었겠나.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며, 어제부터 기웃거리는 창문(창비블로그)으로 한층 초라한 외인이요 철저해진 아웃사이더의 몰골을 본다. 애써 보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비친다. 그들의 이름이 어느새 창문이 되었기에, 구독자로써의 기간도 만료가 되었기에, 한층 자격지심이 늘어나서 맘속으로, 저들은 문창 출신에 귀족적 창문을 달고 중앙의 자리를 차지한 시인들! 기죽이는 시인들!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시인이 아니라 해서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고 반드시 못나기만 한 것도 아니지, 스스로를 달랜다. 애써 달랜단 쪽이 솔직한 표현이겠지만, 그건 그러하다 치고, 요즘 시에 딸린 해설이나 시평들은 대체로 산문식 어투가 대세인 듯 한데, 혼자 웃자는 식으로 말하면 굳이 동상이몽 동가숙서가식 한 지붕 두 가족, 내 맘이지 식으로 보인다 할까, 뭐 그러하다해도 나와 한 방을 쓰고 사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동상이몽과에 속한 꽃들이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하니, 과히 비웃거나 그러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백번 존중하면서도 그냥 심심해서 하는 소리거니, 또 삼천포가 보인다니 그러고 있는 것뿐이다. 아무튼 박형준 시인은 이미지 자체가 '처연'이니 무슨 두 말이 더 필요하랴. 그의 처연함은 단단한 평온과 동급이라서 또 얼마나 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부비고 꼬집고 깨물고 지나갔으랴. 가장 처연함은 바로 그것! 말 할 수 없는 그 부분의 부분의 부분 이꼬루 집합인 것이다. 두 번째 삼천포 길을 다시 빠져나와 나는 콩떡처럼 지껄였던 나의 낙서들을 깨끗이 지운다. 사죄가 필요하다면 사죄를 더 깊은 공감이 필요하다면 더 깊은 공감을… 그러나 시의 화자와 가장 중요한 시인 자신은 그러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처연한가? 무엇이 더, 무엇이 가장 처연한가? 묻는다. 나는 결국 모르쇠로 나가야 겠다. 단, 무심코 당신의 시를 훔쳐왔습니다, 고백 정도는 해야겠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만큼 긴 시제목을....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