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꽃의 변명
꽃의 변명 / 오정자
겨자씨만큼이나 작은 채송화 씨앗을 화단에 뿌렸다. 일찌감치 3월 초부터 뿌리기 시작했는데, 지난 달은 무척이나 추웠다. 겨울로 다시 컴백을 하나, 헷갈릴 정도로 하강한 기온이었다. 그 탓에 씨앗이 얼었는지 채송화 싹이 한 개도 안 보였다. 슬프기도 하여서 채송화 씨앗을 사다가 정성껏 다시 뿌려보았다. 4월에 뿌렸으니 이제는 싹이 나오겠지 기다린 게 일 주일, 아무런 기미(幾微)가 없다. 화단에는 싹 대신 모종으로 심은 꽃봉오리만 얄궃게 웃고 있다. 올해는 결국 채송화 꽃을 못 보려나 하며 서성이자니 화단 끄트머리에 채송화 닮은 야생풀들이 얼쩡얼쩡 올라오고 있다. 채송화 대신 심지도 않은 냉이풀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했고, 한 자리에 붙여둔 줄장미가 발갛게 독이 오르고 있다.
참외밭에선 참외만 열려야 하고 수박밭에선 수박만 열려야 한다는 방정식 같은 이론, 소위 인과율의 일대일 법칙이 우리 집 화단에선 안 통한다. 심었는데도 안 나오는 경우 안 심었는데도 나오는 경우가 여기 있으니, 어디서 날아와 산개(散開;dissemination)한 꽃인가 열매인가 하는 질문은 난해한 질문이다. 대답도 물론 난해하겠지. 쟈크 데리다는 이를 어렵게도 말했다. 그니까 산개란 재구축(reconstruction)을 기대하지 않는 해체(deconstruction)라는 개념과는 달리 구축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해석가능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 뭐라나, 백 번 죽었다 깨나도 못 알아듣겠는 말로 우리 집 화단에서 일어난 현상을 얘기했지만, 나는 느낌만 가질 뿐, 도통(道通)이 도통…
꽃들은 제 이름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켜본바 꽃들은 다툼도 별로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피고 질 뿐, 제 뿌리 내릴 공간 선택도 외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놓인 자리에서 방긋 웃고 있을 뿐, 그래서도 꽃이겠지만 꽃의 낙천성을 여러 해 동안 생각하였다. 활짝 피어날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며 갇힘도 두려워하지 않는 꽃. 꽃의 원전(原典)은 뿌리이기에 아니 씨앗이기에, 꽃은 그에 대한 보답 행위로서 입술을 한껏 벌리고 행인의 발소리와 떠드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웃고 서 있는 것이다. 이 열렬한 꽃에 대한 필사(筆寫)가 심장을 막 두드린다. 새벽의 빗소리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묻기라도 할 듯. 그러나 원전은 스스로 ‘내가 누구요’ 말하지 않는다. 뿌리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현전(現前;presentation)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봄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나의 화단(花壇)은 각자 다르게 기록하는 시선들마저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
채송화 씨앗 채송화 싹 그리고 꽃에도 연연했던 마음을 잠시 말소(抹消)하에 두기로 한다. 채송화 꽃에게 잠시 안녕을 고했지만, 언제라도 판독 가능하도록 표시를 해 둔다.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진하게 진하게, 그리고 마음을 열어두기로 한다. 가능성이겠다 그것은, 닫지 않은 산문(山門)처럼 환하게 벌어진 꽃봉오리겠다. 그래! 더 이상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그것’일랑, 무수한 의미로 흩뿌려 놓기로 하자 우리, 사월이니까, 그래서 네가 오는 길 어느 꽃길일지 몰라도 좋을, 만개(滿開)할 아침을 기다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