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나의 가네코 후미코>
나의 가네코 후미코
밤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13층에서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강을 멈추지 않는다 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산산조각이 난다 날카로운 철골 조각이 내 심장을 찌른다 나는 찌그
러진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방문을 열면
어둠 속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은박으로 처리된 그녀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나는 푸른빛이 감도는 가네코 후미코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당신이 그리웠어 가네코 후미코
당신의 차가운 눈, 꿈결처럼 퍼지는 검은 머리칼, 가늘고 흰 목덜미……
당신처럼 나도
투명한 물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형체 없는 물을 디디고 푸르게 솟아오를 수 있을까
흙을 버릴 수 있을까
꿈속인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당신 가네코 후미코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어, 피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조국을 버리고 싶어
스물세 살에 목숨을 버린 가네코 후미코가 독방에 앉아서 수기를 쓰다 말고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바다를 건너왔다 바다를 건너간 내 아름다운 가네코 후미코가 이 밤에도 내게
무정부주의를 타전한다
밤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13층에서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자이로 드롭처럼 시속 94km의 속도로 수직 하강한다
나는 두개골이 파열되고 척추가 바스라진다 찌그러진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돌
아오는 나에게 가네코 후미코는 무슨 꽃일까.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방민호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비평》신인평론상 수상, 2001년 《현대시》로 시 등단. 저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등.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화자(話者)의 상상 속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났다. 고장 정도를 이미 지나쳤다. 아파트인에게 엘리베이터는 필수일 텐데, 한층 나아가 밤마다 일부러 타는 엘리베이터는 어떤 충동의 상징일까. 상상으론 못 할 짓이 없구나. 자신마저 한방(one touch)에 부숴버리다니.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상상력이다. 낯선 여인을 알려면 위키 사전을 검색하면 된다. 호기심이 더 당기면 책을 사보면 된다. 그녀의 '나는 나'라는 책표지를 입력하고 나도 또 그 죽일 놈의 시를 스캔한다. 아, 이미 죽었나. 그런데 죽은 그녈 화자는 왜 저토록 그리워하고 있나. 이야기 하고 있나. 부초(浮草) 신세를 자처하면서까지 왜 투명한 물에 뿌리를 내리자 하고 있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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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ごうさせたか)>라는 자서전에서 후미코는 스스로 반항운동에 동참한 이유와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명분을 뚜렷이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겪은 체험을 중심으로, 학대 받은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을 표준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자각을 뚜렷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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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디부터 인간평등을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평등 앞에는 바보도 영리한 자도 없으며,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으며, 땅 위의 자연적 존재로서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삶의 가치는 완전히 평등하며, 모든 삶이 삶이라는 오직 한 가지 자격으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완전히 그리고 평등하게 향유해야 할 터입니다." (가네코 후미코; '천황제 타도는 부부의 약속' <運命の勝利者 朴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