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형기 <돌의 환타지아>

미송 2013. 8. 28. 07:48

 

 

 

돌의 환타지아 / 이형기

 

여기 돌 하나 있다

그냥 그렇게

 

그것은 가장 견고한 감옥이다

갇혀 있는 수인은 바로 돌 자신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탈옥의 꿈으로

불타고 있는 돌,

그 불길 식히려고

때로는 진종일 비를 불러 오는 돌

돌의 내부는 심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푸르다 원시의 달밤처럼

또는 이미 죽어버린 미래의 추억처럼

그리하여 스스로 증식하는 돌

사막의 물고기와 에스키모의 눈보라를 낳고

하루살이의 영원과 별똥별의 추락과 바다를 낳는다

돌도끼로 찍어낸 생나무의 절규와 절규를 감싸안고 있는 침묵이

우주공간으로 발사하는 전파

희망과 절망이 맞물려 돌아가는 바람의 소용돌이를 낳는다

그리고 이튿날은 세상을 다시

견고한 감옥으로 되돌려 놓는 돌

그것이 여기 있다

응고된 광활한 자유가 있다

그냥 그렇게

 

 

李炯基(1933~) 경남 진주(晉州)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과 졸업. 동국대학교 교수 역임. 1949년 12월 <문예>에 '비오는 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

시집으로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1971), <꿈꾸는 한발>(1975), <심야의 일기예보>(1990), <죽지 않는 도시>(1994) 등이 있음. 이형기는 우리 시사에서 가장 일찍(18세)문단에 데뷔한 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애초부터 재기 발랄했다. 그의 초기 시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절제 있는 언어로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모더니스트적인 기법을 구사해서 서정을 지적으로 세련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토대로 존재론적 진실을 추구하는 시들을 썼다. 최근의 시적 관심은 생태 환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지 않는 도시>가 보여주는 시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국립공원 입구 화장실 벽이나 휴게소 화장실 벽에 붙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라는 문구를 보다 보면, 나는 종종 이형기의 낙화 한 구절이 연상되곤 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의미면에서 크게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리듬면에선 왠지 닮아 있단 생각을 했다. 돌의 환타지아에 차곡차곡 쟁여진 은유들도 역시 그렇다. 칼 같은 투시가 정제된 형상을 낳고, 무형의 자유가 다시 돌이란 소재로 내면화 되어 컴백하면서, 발로 아프게 찼던 기존의 돌덩이가 말랑말랑하게 안긴다. 한 독자의 견해에 잡힌 낙화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붕 떠 있는 잎사귀가 될 수도 있듯, 시인의 예리한 무엇에 잡힌 돌은 자유자재로 고체가 되기도 기체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제목 그대로 환타지아다. 주체는 그리 중요치 않은, 그래서 더욱 환타직한, 그 안에 사람이 살고 돌이 산다. 돌과 사람이, 자유인과 수인이, 천국과 지옥이, 함께. 주홍빛 환타와 검은 코카인 콜라가 함께. <오>